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만몽 침탈은 천조국을 엿먹인 세계사




한마디로 메이지말~다이쇼 초기 대미(對美) 외교전에서 한판 승리를 일궈낸 산물이라 할 수 있음.

러일전쟁 기간까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고, 대청(對淸) 문호개방을 보증받고자
일본을 후원해주던 미국이었으나, 대러전쟁 승전으로 조선반도의 교두보를 확보한 한편 만주에 대해서도
팽창 야욕을 노골화시킨 일본의 행보에 경계하며, 마침 불거진 캘리포니아 이민자 사안과도 결부되어
백색함대 일주를 위시로 한 1907년 이후 미일관계는 수면 아래로부터 악화될 조짐이 감지 ・고조되고 있었다.




                     빡빡이 클럽(?) 오야마(大山) 내대신 국장에 참례중인 원로 및 수상 3인방, 1916년 12월 17일   
                     왼쪽부터 야마가타(山縣) 추밀원 의장,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데라우치 총리대신






철도왕 해리먼의 만주철도 매수 공작은 외무대신 고무라의 훼방으로 막판에 결렬된데다,
러일전쟁의 전리품인 남만주 권익을 사수해야 한다는 인식이 일본 정가내 공통된 견해로 자리잡은 가운데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을 저지시키고 싶었던 미국에 대하여 3국협상에 포위되어 3B정책의 붕괴를 감지한
독일의 카이저가 1907년 가을, 대청 차관과 경제권익 확보를 담보로 '獨美淸' 3국동맹의 구상을 타진하게 됨.

여기에 테디 루스벨트도 외견상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단 입장을 귀띔하면서 독미청 연대와 관련한
협상 무드가 고조되는 듯 싶었으나, 이를 간파한 고무라가 선수를 쳐서 루트-다카히라 협정(1908.11.30)으로
이민문제 양보를 미끼삼아 조선 병합의 법적 추인과 동의를 미국한테서 받어내었음. 시기상으로도 
카이저의 <데일리 텔레그래프>紙 인터뷰 파문 악재가 돌발해버려 미국내 대독 불신이 가시화된 점 이외에

광서제-서태후 사망으로 구심력을 더욱 상실한 청국의 정변마저 겹치면서 독미청 3국동맹은 파토남.
고무라의 선행조치로 잠정 수습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처럼 관측된 미일관계는 1909년 하반기,
태프트 행정부가 '달러외교'식 전략하에 자본 투자와 문호개방을 무기로 만주철도 중립화 방안을 제기하는 등
일본의 남만주 독점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강경노선을 천명하면서 다시금 위기 국면으로 돌입. 

이같은 미국의 압박에 대응한 일본의 전략인즉슨 '유라시아 합종책(合從策)'의 구현이라 지칭할 수 있다.
즉, 기존의 영일동맹 확인은 물론, 1904년부터 개선 일로인 영불 ・영러협상에 편승한 불일 ・러일협상의 타결로
소위 '4국 앙탕트 체제(Quadruple Entente)' 구축을 통하여 미국의 공세를 무력화시킨다는 것이 그 골자인데,
러시아 외상 이즈볼스키가 주일공사 경험에 비추어 발칸반도 위기로 대변된 유럽 정세에 역량을 집중하려면 

'대일 협력이 필수'라는 명제하에 적극적인 대일 유화책-러일 공조를 추구함으로써 일본에 힘을 실어주었음.
이즈볼스키의 의지외에도 일본 역시 '파나마 운하 개통에 대비한 극동안보 강화론'으로 러시아를 설득,
특히 1909년 가을부터 미국의 만주 진출 기도가 표면화됨에 따라, 러일 공조의 필요성이 일층 대두되었으며,
포츠머스 조약의 후속작인 1907년의 1차협약 불완전성을 보완시켜 선린관계 수립을 위한 단계에 착수함.

당초 러시아측 대일협상 태도를 견인하려는 카드로 써먹어온 청국과의 간도 분쟁도 해결됐겠다,
고토 신페이의 주선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죽음의 여행'이 되버린 하얼빈 방문에 나섰던 동기 자체가 다름아닌
극동 시찰차 만주로 건너온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동해 러일협약의 개정에 대비한 의견 교환을 위해서였지.
결국 2차협약으로 러시아의 일한합방 동의를 확약받은데 이어서 3차협약(1912.7.8) 추가 성립에 이르기까지

러일은 몽골~만주에서 이견 차이를 완전히 해소하는 한편, 1차대전기 準군사동맹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함.
4국 앙탕트와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상 우군이 된 러일관계의 진전[=만철 중립화 실패]마저 거듭되어
만주 진출은 커녕, 도리어 3면으로 포위당할 처지에 직면해 다급해진 미국은 영미중재조약(1911.8.3)의 체결로  
영일동맹의 공수동맹적 성격을 일정 부분 약화시키고자 했으나... 정작 보호관세 문제로 태프트와 대립한

미 상원의 거부권 행사로 비준받지 못하는 바람에 절름발이 협정으로 전락함.ㅋ
대개 영미중재조약 교섭이 마무리되던 찰나에 갱신된 3차 영일동맹(1911.7.13)을 가리켜 국내 학자들은 
'영미중재조약=영일동맹 약화'란 논지를 전개하기 일쑤지만, 영러협상 타결에 따른 근동 위기 해소와 맞물려
영일동맹의 주요 표적이 러시아에서 독일로 대체되어 유사시 산동반도 조차지와 홍콩, 남양군도에 대한

일본의 군사 개입 가능성을 열어놨다는 사실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동맹의 방향 전환-확대로 봐야 함.
일본의 1차대전 참전 과정도 3차 영일동맹의 기조에 따르며 산동 ・남양의 독일령 식민지를 공략한 것이고,
이는 여태껏 만몽에만 집중된 일본의 팽창 시야를 중국 내지~남태평양에까지 확장시킬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그만큼 미국의 극동 문호개방 노선은 중대한 타격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워싱턴 체제 출범까지 지속됨.

대서양과 발트해로부터 중부유럽[독일]을 고립시키고, 중근동~인도~시베리아를 거쳐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4국 앙탕트에 일본이 참가한 배경은 신대륙[미국] 발흥에 대항하고자 구대륙 결합이 절실하다는 합종론.
이를 고토 신페이가 극동에까지 확장하여 유럽 ・일본의 공동전선을 가동시키려는 구상도 내포되어 있는데,
'구대륙 제국'을 결합시킬 1차 수단으로 거론되었던 최대의 과제가 바로 영러 ・러일간의 제휴였고.ㅇㅇ

추가로 부연하자면 미국의 만주 진출 기도야말로 조선 병탄을 가속화시킨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바,
가쓰라 내각이 오헝제국의 보스니아 병합에 영감을 얻어 조선 병합을 잠정적으로 결의(1909.7.6)하긴 했어도,
시기는 미정인 채로 유동적인 정세였음. 그러다 1909년 연말부터 병탄에 급속히 무게추가 기울어진데엔
미국에서 제기한 만철 중립화 방안이 이토 암살후의 위기감과 연동, 남만주로의 미국 영향력 침투에 대비해

후방인 조선반도에서 일본 주도권을 명확히 보장하되, 2차 러일협약(1910.7.4) 준비 과정과 병행시킨
사전 정지작업 차원하에 메이지 정부의 당국자들로 하여금 '결단'을 재촉케만든 기제로 작용되었기 때문임.
마침내 조선 시정방침의 결정(6.3)과 합방계획(6.18)이 공포되어 조기에 영구병합 절차를 확정한 다음,
러일협약 개정을 기다렸다가 데라우치가 경성으로 부임(7.23)한지 1개월만에 합방조약 조인되면서 The End.




              영국 ・러시아 대사와 인사를 나누는 데라우치 수상, '4국 앙탕트' 작동은 구대륙 합종책의 진가였다.




덧글

  • 라라 2015/02/07 22:33 # 답글

    1. 독청미 동맹이 이뤄졌다면 청나라 멸망이 더 미루어졌을 수도 있고

    조선도 멸망이 더 늦쳐졌을 수도 있겠군요.

    2. 독일 미국 동맹이 이뤄지면 1차 대전이 어떻게 진행 됐을가 싶기도 하네요.

    영프러 연합군 패배와 독미오-헝 동맹 승리..라 흥미로운 대체역사 소설 소재군요

  • jaggernaut 2015/02/08 10:17 # 답글

    양대양에서 적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위험과 아직 해군력이 성장 도중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죠. 아직 미서전쟁의 노획물조차 소화시키기 전이니까요.

    다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세로 보면 일본에게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 心月 2015/02/08 10:58 #

    필리핀에서의 게릴라 전쟁은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고, 파나마 운하 개통도 임박해지면서 러일의 팽창 속도와 비례, 더이상 극동 진출을 늦출 수 없다는 태프트-녹스 콤비의 조바심이 발동한거죠. 그게 하필 이해가 제각각인 열강 제국들을 억지로 끌어들여 말기증상 단계의 청조와 합작해 만철 신디케이트 구성하려는 나이브한 인식과 시도에서부터 패착이었겠습니다만. 유럽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그토록 장기화되어 합종 파트너였던 영불러가 모두 힘이 소진될 것이란 선험적 판단은 대전 이전의 정황만 놓고 보자면 논외의 변수인데다, 만몽의 특수권익 사수란 1차 목표를 달성한 이상 일본이 거둔 외교전 승리의 의미를 완전히 퇴색시킬 순 없다고 봅니다.
  • jaggernaut 2015/02/08 18:36 #

    다만 장기적 혜안의 결여란 점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인구, 병력, 석탄생산량, 철도총연장, 철강생산량, 함선보유수 및 총톤수, 국토면적 등으로 표현되는 당시의 국력지표 기준으로 이미 미국은 남북 전쟁기에 세계 최강을 북부 단일으로 찍은 경력이 있는 만큼 대립각을 세울 상대를 잘못 고른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미국은 영국마저도 슬슬 접어주는 분위기였고, 산업생산은 영국에 이어 독일까지 제쳐버린 시기니까 말입니다.
  • 진보만세 2015/02/08 11:22 # 답글

    이런저런 우여곡절끝에 유신의 최종과실을 독식한 쵸슈-사츠마 3인방이 모인 첫머리 사진이 인상깊네요..
  • 心月 2015/02/08 15:03 #

    사실 데라우치가 수상으로 천거된 것도 오쿠마파를 비롯한 정당세력에 대처하려는 원로의 집단 행동이 반영된 배경이 깔려있었죠. 그런 조슈 군벌의 적자 데라우치마저 왕초 보스의 심기를 거스르며 정우회에 접근.ㅋ
  • 스펀지송 2015/10/21 00:32 # 삭제 답글

    미국의 루즈벨트는 일본이 미국의 중국 진출을 위한 통로인 조선, 남만주에 대한 권리를 제공하겠다는 말에 넘어가서 일본의 조선 병합을 지지했죠. 그런데, 일본이 그 약속을 어기고 조선, 남만주를 합병하려고 하자 테프트가 반일정책으로 밀고 간 거죠.
    이승만, 안창호는 미일 전쟁이 발발하면, 조선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미국에게 보장받을 수 있다는 믿음 하에 도미했죠.

    조선은 미국과 일본의 대립을 통해 독립을 유지하려고 별 짓을 다했지만 결국 합병되면서 멸망했죠.
  • ㅁㅁ 2019/10/30 08:55 # 삭제 답글

    그리고 대일본제국은 멸망했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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