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36권上, 방훈(龐勛)의 난(亂) (2) 세계사








함통(咸通) 10년(869) 봄 정월, 강승훈(康承訓)이 제도(諸道) 군사 7만여명을 거느리고 유자(柳子, 안휘성 수계현)의 서쪽에 주둔하고, 신흥(新興, 안휘성 와양현)에서부터 녹당(鹿塘)까지 30리(里)에 성벽과 보루가 서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서주의 병사들이 사방을 나누어 수비하자, 성안엔 수천명도 미치지 못했으며, 방훈이 비로소 두려워했다. 백성들은 대부분 구덩이를 파서 그안에 숨었고, 방훈이 사람을 보내어 토굴을 수색해 [백성들을] 병사로 삼았지만, 하루에 2~30명을 얻는데 불과했다. 방훈의 장수였던 맹경문(孟敬文)이 풍현(豐縣)을 지키고 있었는데, 교활하고도 사나워 병사가 많았고, 방훈에게 두 마음을 꾀하여 스스로 부참(符讖)을 만들었다. 방훈이 이를 들었으나, 마침 위박(魏博)이 풍현을 공격하자 심복 장수를 파견해 3천명을 거느리고 맹경문을 도와 풍현을 지키게 했다.

맹경문이 그와 더불어 약조하길 위박군(魏博軍)을 함께 공격하고, 또한 그 용기를 자랑하고자 선봉에 서도록 했다. 신군(新軍)이 이미 위박군과 교전하면서 맹경문이 군사를 데리고 물러나 달아나자 신군은 모두 없어졌다. 방훈이 마침내 사자를 파견해 그를 속여서 '왕홍립(王弘立)이 이미 회남(淮南)에서 승리해 유후(留後)가 스스로 가서 진수(鎭戍)할 것이니, 제장들을 모두 불러서 서주를 지킬 만한 사람을 선발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맹경문이 기뻐해 즉시 팽성(彭城)으로 달려갔는데, 성에 이르기 수(數)리에 못미쳐 방훈의 복병이 그를 사로잡았으며, 신유일에 죽였다. 서주의 적(賊)들이 해주(海州, 연운항시)를 노략했다. 당시 제도의 병사로 해주를 지키던 자가 이미 수천명이었고, 적들이 통과할 다리의 기둥을 끊어 떨어지지 않도록 해놓고, 이어서 요해처마다 복병을 배치시켜 대기했다.

적들이 지나가다가 다리가 무너지면서 창황(蒼黃, 급하고 겨를없이)하여 흩어지거나 혼란했는데, 복병들이 일어나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가운데 수주(壽州)를 공격한 자들은 다시 남도군(南道軍)에게 격파되어 참수되고 붙잡힌 자가 수천명이었다. 신당(辛讜)이 절서(浙西)의 군사를 데리고 초주(楚州, 강소성 회안시)에 당도하자, 칙사(勅使) 장존성(張存誠)이 선박을 가지고 그를 도왔다. 서주의 적들이 수륙(水陸)으로 병사를 늘어놓아 회하(淮河)의 물길을 봉쇄하여 끊어버리자, 절서의 군사들은 그들의 강함을 꺼려해 감히 나아가질 못했다. 신당이 '내가 청컨대 선봉이 되어 승리하면 그것을 이어주고, 패배하면 너희들은 달아나거라'라고 말했다. 오히려 불가하다고 했음에도, 신당이 마침내 군중(軍中)에서 결사대 수십명을 모집하고 선발해 첩(牒, 공문)으로 직명(職名)을 보임하였다.

우선 쌀을 선적한 선박 3척과 소금 선박 1척을 바람을 타고서 반대로 흘려서 곧바로 나아가게 했는데, 적들이 이를 협공하자 배의 판(板)에 화살이 박힌 것이 비오는 것과도 같았다. 사슬을 쳐놓은 곳에 이르자, 신당은 무리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싸우며 도끼로 사슬을 끊어버리고 마침내 통과할 수 있었다. 성위에선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땅을 진동시켰고, 두도(杜慆)와 장좌(將佐)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를 영접했다. 을유일, 성위에서 돛을 드러낸 수군[舟師]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 보였고, 그 깃발들이 절서군(浙西軍)임을 인식했다. 성에서 10여리 떨어진 장소에서 적들이 화선(火船, 화공용 선박) 늘어놓아 이를 막으면서 범선(帆船)이 멈추고, 나아가질 못했다. 두도가 신당에게 결사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나아가 맞이하도록 명했으며, 전함에 올라가 적들의 진지에 부딪치면서 지나갔다.

장존성이 쌀을 선벅한 선박 9척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장사(將士)들이 길에서 있다가 앞으로 물러나면서 저 장존성은 누차 자살하고 싶었지만, 겨우 여기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또다시 나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당이 겉으로 '적들은 많지 않으니, 아주 쉽게 더불어 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무리들을 거느리고, 깃발을 게양해 북[鼓]을 시끄럽게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적들은 그 형세가 사납고도 날카로와 그것을 피했으며, 마침내 성으로 들어갔다. 2월, 강승훈이 주사적심(朱邪赤心, 李國昌)으로 하여금 사타(沙陀)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선봉으로 삼았는데, 진지를 무너뜨리며 적(敵)을 물리치자 10개 진(鎭)의 병사들이 그의 날래고 용감함에 엎드렸다. 강승훈이 일찍이 휘하의 1천명을 이끌고 환수(渙水)를 건너는데, 적의 복병들이 포위했다.

주사적심이 기병 5백을 이끌고 분발해 치면서 포위망에 부딪쳐 강승훈을 뽑아 구출하자 적들의 형세가 쓰러졌으며, 이어서 연합해 공격해 그들을 패배시켰다. 강승훈이 자주 적들과 싸우면서 적들의 군사가 거듭 패하였다. 왕홍립은 회구(淮口)의 승리에 스스로 현혹되어 홀로 부하 3만명을 거느리고 강승훈을 격파시키게 해달라며 청하자, 방훈이 허락했다. 기해일, 왕홍립이 군사를 이끌고 수수(濉水)를 건너가 밤중에 녹당채(鹿塘寨)를 습격하였고, 새벽에 그를 포위했다. 왕홍립이 제장들과 더불어 임석하여 바라보고, 몸소 공적을 세움이 누각(漏刻)에 있다고 여겼다. 사타족 군사가 좌우에서 포위로 돌진했는데,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날아가는 것과도 같아서 적들이 분란하여 옮겨 피하자, 사타가 기병을 풀어 이들을 유린했고, 영채안의 여러 군사가 다투어 나와서 힘껏 공격하니, 적들이 대패했다.

관군(官軍)이 그들을 수수로 몰아세우자 익사한 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며, 녹당(鹿塘)에서 양성(襄城, 안휘성 숙주시)에 이르기까지 엎어진 시체가 50리에 걸쳐 널려 있었고, 참수한 숫자만 2만여급(級)이었다. 왕홍립이 단기(單騎)로 달아나 모면했고, 몰아서 노략질한 평민들도 모두 흩어져 산골짜기로 달아나매 다시는 군영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내버린 물자와 양식, 기계(器械, 병장기)가 산처럼 쌓였다. 이때 조칙(詔敕)으로 여러 군사들은 도적들을 격파하면서 농민을 얻으면 모두 이들을 석방하라고 했는데, 이로부터 적들은 매번 관군과 조우했을 때마다 그들이 몰아서 노략한 백성들이 먼저 스스로 무너졌다. 방훈과 허길(許佶)은 왕홍립이 교만하고 게을러 패배함에 이르자, 그를 참수해 버리고자 했으나 주중(周重, 방훈 군영의 참모)이 왕홍립을 위하여 방훈에게 유세하였다.

'왕홍립은 두 차례 승리하였고, 아직 상도 없었는데 한 차례 패배했다고 그를 주살한다면, 공적을 세운 것을 버리고 허물을 기록함으로 적(敵)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는 셈이며, 제장들도 모두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자를 용서하여 나중에 책임을 지우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방훈이 마침내 그를 석방하였다. 왕홍립이 흩어진 병졸을 모았으나 겨우 수백명으로 사주(泗州, 강소성 우태현)를 탈취해 과오를 갚도록 해달라며 청하자, 방훈이 그의 병사를 보태어 그곳으로 파견했다. 3월에 강승훈이 이미 왕홍립을 격파하고, 나아가 유자를 압박해 요주(姚周)와 한달간 수십 차례 싸웠다. 정해일, 요주가 병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는데 관군이 공격하자 요주는 물러갔고, 관군이 추격하여 마침내 유자를 포위했다. 마침 커다란 바람이 불어와 사방에서 불을 멋대로 놓았고, 적들은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사타족이 정예 기병으로 그들을 맞이해 도살(屠殺)하면서 모조리 죽여버리니, 유자에서 방성(芳城)까지 죽은 자가 서로 베개를 벤 채로 있는 듯 하였고, 그들의 장수인 유풍(劉豐)도 참수하였다. 요주가 휘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숙주(宿州)로 달아나자, 숙주의 수비대장인 양비(梁丕)가 그와 평소에 틈이 있어서 성문을 열어 들어오도록 허락하고선 붙잡아 참수해 버렸다. 방훈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해 허길과 스스로 거느리고 출전하는 것을 논의했다. 주중이 눈물을 흘리며 방훈에게 '유자는 중요한 지역으로 군사들도 정예였으며, 요주는 용감하고 지모(智謀)를 갖추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엎어져 죽고 말았으니, 위험하기가 계란을 쌓아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드디어 대호(大號, 建國)를 세우고 병사를 모조리 모아 사방으로 나가서 죽을 결심으로 힘껏 싸우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최언증(崔彥曾)을 죽여서 사람들의 바램을 끊어버리도록 권고했다. 술사(術士) 조군장(曹君長) 역시 '서주의 산천(山川)은 2명의 장수를 용납치 못합니다. 지금 관찰사(觀察使, 崔彦曾)가 아직 있으니, 그러무로 유후(留後)께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역적의 무리들이 모두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여름 4월 임진일, 방훈은 최언증과 감군(監軍) 장도근(張道謹), 선위사(宣慰使) 구대부(仇大夫), 요좌(僚佐) 초로(焦璐)와 온정호(溫庭皓)를 죽였으며, 그들의 친속 ・빈객 ・노복 ・처첩들 또한 나란히 죽었고, 회남감군 곽후본(郭厚本)과 도압아(都押衙) 이상(李湘)의 손발을 잘라서 강승훈의 군사들에게 내보였다. 방훈이 마침내 무리들을 모집해 겉으로 선언하였다.



"나 방훈은 비로소 국가의 은혜를 바라면서 신하로서의 절의(節義)를 모두 온전히 했다. 오늘날의 일은 이전의 뜻을 이미 어그러 뜨렸다. 여기서부터 방훈은 제군(諸軍) 가운데 진정으로 반자(反者)들과 더불어 마땅히 경내(境內)의 군사를 쓸어버리고, 서로 힘을 모아 한마음으로 패배한 것을 돌려서 공적을 이룩할 따름이다!"



무리들이 모두 훌륭하다며 칭찬했다. 이에 성안의 남자들에게 명령해 모두 구장(毬場, 격구장)에 집결하도록 하고, 이어서 제장들을 파견해 나란히 있는 집들을 크게 수색하여 감히 1명의 남자라도 숨겨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안을 족멸시켰다. 정장(丁壯, 壯丁)을 선발해 3만명을 얻었고, 다시 깃발을 제조해 날카로운 무기를 지급했다. 허길 등이 방훈을 공동으로 추대하여 '천책장군(天冊將軍) 대회명왕(大會明王)'이라 했으나, 방훈은 왕작(王爵)을 사양했다. 이보다 앞서 신당(辛讜)이 재차 사주(泗州)로부터 날래고 용감한 사람 4백명을 이끌어가 양주(揚州)와 윤주(潤州, 강소성 진강시)에서 양식을 맞아들였는데, 적들이 강기슭 양쪽에서 공격하자 이리저리 싸우면서 1백리를 가서야 이내 벗어날 수 있었다. 광릉(廣陵)에 이르러 공관(公館)에서 멈췄으나, 감히 귀가(歸家)하지 못했다.

배에는 소금과 쌀 2만석(石), 전(錢) 1만 3천민(緡)이 실려져 있었고, 을미일에 돌아와 두산(斗山, 강소성 우태현)에 도착했다. 역적의 장수 왕홍지(王弘芝)가 무리 1만여명을 거느려 우태(盱眙)에서 이들을 제지하면서 은밀하게 전함150척을 세우며 회하의 물길을 채워두고선 또한 화선(火船)을 풀어서 그들을 맞았다. 신당이 장차(長叉, 쇠고랑)를 가지고 밀어넣도록 명령하고, 묘시(卯時)에서부터 미시(未時)가 되기까지 싸우다 중과부적(眾寡不敵)으로 관군이 승리하지 못했다. 적들이 전함에 나무를 묶어서 옆으로 4~5척이 나오게 하여 전붕(戰棚, 선반)으로 삼으니, 신당은 용사들에게 작은 배에 올라타 그 아래로 들어가도록 명령해 화살과 칼이 도달하지 못하게 하였고, 창(槍)에다 화우(火牛, 화공용 풀)를 매달아 그곳에 불을 붙였는데, 전함이 이미 타버리면서 모든 적들이 무너지며 달아났다.

방훈이 아버지 방거직(龐舉直)을 대사마(大司馬)로 삼고, 허길 등과 더불어 서주에서 유수(留守)하게 했다. 누군가 '장군께서 바야흐로 군사의 위엄을 빛내시는데, 부자(父子)의 친함으로 상하(上下)의 절도를 잃으면 안됩니다'라고 말하자, 마침내 방거직으로 하여금 뜰에서 추배(趨拜)하도록 했으며, 방훈은 의자에 기댄 상태로 이를 받았다. 당시, 위박(魏博)이 거듭 풍현을 포위하자, 방훈이 먼저 그들을 치고자 병신일에 군사를 이끌고 서주를 출발했다. 방훈이 밤중에 풍현에 이르러 몰래 입성(入城)했는데, 위박군은 모두 눈치채지 못했다. 위박은 나누어 5개 영채로 만들고, 그 부근의 성에다 수천명을 주둔시켰다. 방훈이 군사를 풀어서 이들을 포위하자, 여러 영채에서 구출하고자 했다. 방훈이 요로(要路)에다 병사들을 매복시켰다가 관군 2천명을 죽이매 나머지는 모두 돌아서 달아났다.

적들이 영채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한 채 밤이 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관군은 그 무리를 두려워하고, 게다가 방훈이 스스로 왔다는 사실을 듣고선 여러 영채가 모두 밤중에 무너졌다. 조상(曹翔, 연해절도사)이 바야흐로 등현(滕縣, 산동성 등주시)을 포위하는데 위박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연주(兗州)를 지켰다. 적들이 그 성채를 모조리 헐어버렸고, 그들의 물자와 양식을 운반해 가면서 서주에 격문을 전달해 왕성하게 스스로 과장하여 관군을 '국적(國賊)'이라 운운했다. 마거(馬舉, 회남절도사)가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원하는데, 을사일에 군사를 3도(道)로 나누어 회하를 건넜으며 중류(中流)에 당도해 크게 떠들자, 소리가 수리 밖까지 들렸다. 적들이 크게 놀라고, 관군 무리의 숫자를 가늠하지 못했기에 군사를 거두어 사주성의 서쪽 영채에 주둔했다.

마거가 나아가 이들을 포위하고, 불을 놓아 목책을 태우자 적들이 대패했으며, 참수한 것이 수천급이었다. 왕홍립은 죽었고, 오형(吳迥)은 물러나 서성(徐城, 우태현 서북쪽)을 지키니 사주의 포위가 해체되었다. 사주가 포위당한지 무릇 7개월이었는데, 성을 수비하던 자들은 수면을 못하여 얼굴과 눈에 모두 종기가 생겼다. 방훈이 풍현에 수일간 체류하다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강승훈을 치고자 하였다. 누군가 '장군께서 군사를 내온 지 며칠만에 7만의 무리를 꺾었으니, 서군(西軍)은 떨고 두려워하는데, 이러한 명성과 형세에 편승한다면 저들은 깨서거 도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시기를 잃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말했다. 방거직이 편지로 방훈에게 승리한 기세를 타고 진군하라며 권하자, 방훈이 속으로 마침내 결정했다. 정미일에 풍현을 떠나 경술일, 소현(蕭縣)에 이르기로 했다.

양성(襄城) ・유무(留武) ・소수(小睢)의 여러 영채의 군사들을 합쳐서 5~6만명이 29일 동이 틀 무렵에 유자(柳子)를 공격하기로 약조하였다. 회남에서 패한 병졸로 역적들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도망하여 강승훈에게 와서 그 기일을 고변하자, 강승훈이 먼저 이를 위하여 준비하고, 말[馬]들을 먹여 무리를 정돈해 매복시켜 적들을 기다렸다. 병진일, 양성 등의 군사들이 우선 유자에 도착했는데, 복병을 만나서 패배하여 달아났다. 방훈은 이미 스스로 시기를 놓쳐서 급히 군사를 이끌고 30리 밖에서부터 그곳으로 갔는데, 도착할 무렵에 여러 영채가 이미 패배한데다, 방훈이 거느린 자들은 모두 시정(市井)의 백도(白徒)들이어서 관군의 형세가 왕성한 것을 목도하자 모두 싸우지 않고도 무너졌다. 강승훈이 제장들에게 급히 그들을 추격하라 명하고, 기병으로 그 전방을 치면서 보병으로 배후를 압박했다.

적들이 낭패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서로가 밟아서 쓰러진 시체가 수십리에 걸쳐 있었으며, 죽은 자들만 수만명이었다. 방훈은 갑옷와 옷을 벗어버린 채 흰색 저고리를 입고 도망쳐 흩어진 병졸을 수십하니, 겨우 3천명이 불과하자 팽성으로 돌아갔다. 그 장수인 장실로(張實)로 하여금 여러 영채의 군사들을 나누어 제성역(第城驛, 숙주 서쪽)에 주둔하도록 했다. 방훈이 처음에 하비(下邳)에서 봉기하는데 토호(土豪) 정일(鄭鎰)이 무리 3천을 모집해 스스로 물자와 양식, 병장기를 준비하여 그에게 호응해 방훈을 장군으로 삼고, '의군(義軍)'이라 불렀다. 5월에 기주(沂州)에서 군사를 파견해 하비를 포위하자, 방일이 정일에게 명령해 그곳을 구원하도록 했으나, 정일은 부하들을 인솔하고 와서 관군에 투항했다. 6월에 마거가 사주에서부터 군사를 이끌고 호주(濠州)를 공격하였다.

마거가 초의(招義) ・종리(鍾離) ・정원(定遠)을 뽑았다. 유행급(劉行及)이 성밖에 영채를 설치해 막으면서 지켰는데, 마거가 우선 가벼운 경기(輕騎)를 보내어 도전하자 적들이 그 숫자가 적음을 보고선 다투어 영채를 나와 서쪽으로 가서 공격하니, 마거는 대군(大軍) 수만을 이끌고 샛길로 그들의 동남쪽을 쳐서 마침내 그들의 영채에 불을 질렀다. 적들도 들어가서 굳게 지키자, 마거는 그들의 3면에다 참호를 굴착해 포위했는데, 북쪽으로 회하에 맞대어 적들이 오히려 서주와 연락할 수가 있었다. 방훈이 형님을 파견해 유행급을 도와 호주를 지키도록 하였고, 군사들을 북진(北津)에 주둔시켜 호응했으나, 마거는 별장(別將)을 파견해 강을 건너 치면서 참수 ・사로잡은 것이 수천이었으며, 그 영채를 평정했다. 조상이 물러나 연주에 주둔하고, 창주(滄州) 병졸 4천명을 남겨서 노교(魯橋)를 지켰다.

병졸들이 멋대로 돌아오자, 조상은 '방훈이 난(亂)을 일으켜 그것을 토벌하는 것이다. 지금, 창주의 병졸들이 약조를 따르지 않았으니, 이는 스스로 어지럽힌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군사를 수습해 이들을 맞아 연주성 밖에서 포위하고, 명령을 어긴 2천명을 가려내어 모두 주살했다. 조정(朝廷)에서는 위박군이 패배한 사실을 듣고, 장군 송위(宋威)를 서주서북면초토사(徐州西北面招討使)로 삼아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풍현과 소현 사이에 주둔시켰는데, 조상이 재차 병사를 이끌고 이들과 만났다. 가을 7월에 강승훈이 임환(臨渙, 안휘성 수계현)에서 승리하여 죽이거나 붙잡은 것이 1만명으로 마침내 양성 ・유무 ・소수 등 영채들을 뽑았다. 조상은 등현을 뽑았고, 나아가 풍현과 패현(沛縣)을 쳤다. 적들의 여러 영채를 지키던 병사들은 대부분 서로가 이끌어 도망가 숨어서 산림을 점거하고 지켰다.

적들이 초략(抄掠)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번번히 죽였는데, 오팔촌(五八村)이 더욱 심하였다. 진전유(陳全裕)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들을 인솔하자, 무릇 방훈을 배반한 자들이 모두 그에게 귀부해 무리가 수천명으로 싸우고 지키는 도구가 모두 갖춰졌으며, 주위가 수십리로 적들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 강승훈이 사람을 보내어 이들을 부르니, 마침내 무리를 들어 가지고 와서 투항하였고, 적들의 무리가 더욱 흩어졌다. 기현(蘄縣)의 토호(土豪) 이곤(李袞)이 역적의 수장(守將)을 죽이고 성(城)을 들어서 강승훈에게 항복했다. 패현(沛縣)의 수장 이직(李直)도 팽성에 달려가 사안을 가늠해주자, 비장(裨將) 주매(朱玫)가 성을 들어서 조상에게 항복했다. 이직이 팽성에서 돌아오는데 주매가 거꾸로 쳐서 그자를 도망가게 만들자, 조상이 군사를 발동시켜 패현을 지켰다. 주매는 빈주(邠州) 사람이다.

방훈의 그의 장수 손장(孫章)과 허길을 파견해 각자 수천명을 거느리고 진전유와 주매를 공격했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강승훈이 승리한 것에 편승해 멀리 달려가 제성(第城, 숙주 남쪽)을 뽑아버리고, 더 나아가 숙주의 서쪽에 이르러 성을 축조하면서 이곳을 지켰다. 방훈은 걱정스럽고도 번민한 나머지 어찌할 바조차 몰랐으며, 다만 신(神)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반승(飯僧)할 따름이었다. 처음에 방훈은 양비(梁丕)가 멋대로 요주(姚周)를 죽인 것에 노하여 그를 축출하고, 서주의 옛 장수인 장현임(張玄稔)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해 주사(州事)를 다스리게 했는데, 그 무리인 장유(張儒)와 장실(張實) 등이 성안의 군사 수만을 거느리면서 관군을 막았다. 장유 등이 영채를 성밖에 여러개 두껍게 설치해가며 둘러싸인 물[垓子]로 스스로를 굳게 하였다. 강승훈이 이들을 포위하였다.

장실이 밤중에 사람을 보내어 몰래 나와서 서한을 가지고 방훈에게 보고하였다.



"지금, 국병(國兵)이 모두 성 아래에 있는데, 서방(西方)은 반드시 반드시 비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의당 병사들을 인솔하고 그들이 생각치 못하게 나가시어 송주(宋州, 하남성 상구현)와 박주(亳州, 안휘성)의 근방을 겁략하신다면, 저들은 분명 포위를 풀어 서쪽으로 갈 것입니다. 장군께서 요해처에 매복을 배치했다가 그 앞에서 맞이하여 친다면 저 장실 등은 성안의 군사를 내어서 그들의 배후를 압박할 것이니, 격파시킬 수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당시, 조상은 주매가 풍현을 치도록 하면서 그곳을 깨뜨렸고, 승리한 기세에 편승해 서성(徐城)과 하비를 쳐서 모두 뽑아내고,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만(萬)으로 계산되었다. 방훈이 바야흐로 걱정하고 두려워 달아나려 했는데, 장실의 편지를 받자 즉시 대책을 따라 방거직과 허길에게 서주를 지키도록 하고,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갔다. 8월 임자일, 강승훈이 성밖의 영채를 불태우니, 장유 등이 들어가 나성(羅城)을 지켰다. 관군이 이를 공격해 죽은 자가 수천명인데도 승리하지 못하자 강승훈이 걱정해 변사(辯士)를 성 아래로 보내어 초유(招諭)했다. 장현임은 일찍이 변방을 지키면서 공적을 세웠기 때문에 비록 위협을 받아 역적들을 따랐지만, 내심으로 늘 걱정하거나 분통해했다. 그때 소속병들을 거느려 자성(子城)을 지켰는데, 밤중에 가까운 수십명을 불러내어 귀국을 모의했다.

이어서 조금씩 퍼뜨리고 타이르자 협조하려는 자들이 많아졌으며, 마침내 심복 장고(張皋)를 파견해 밤중에 나가서 상황을 강승훈에게 알리고, 시기를 정하여 역적들의 장수를 죽여서 성을 들어가지고 항복하기로 했다. 시일이 되면 청색 정기(旌旗)를 세우며 호응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고, 무리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도 의심이 없도록 하였다. 강승훈이 크게 기뻐하며 이를 따랐다. 9월 정사일, 장유가 유계정(柳溪亭)에서 술을 마시는데, 장현임이 부장(部將) 동후(董厚) 등에게 정자의 서쪽에서 군사들을 챙기도록 하고, 장현임이 먼저 말에 뛰어 오르며 앞으로 가면서 크게 소리치길 '방훈은 이미 복야(僕射, 康承訓)의 영채에서 효수(梟首)당했거늘, 이 무리들이 어떻게 오히려 잔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사졸들이 다투어 나아가 드디어 장유 등 수십명을 참수하니, 성안이 크게 소란해졌다.

장현임이 당나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가지고 타이르매 저녁이 되면서 안정되었다. 무오일에 성문을 열고 나가서 관군에 항복하였다. 장현임이 강승훈을 만나자 속살을 드러내고, 무릎으로 기어가는데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였다. 강승훈이 위로하고, 즉시 조칙(詔勅)을 선포하여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주었으며, 포상으로 낸 것도 몹시 후하였다. 장현임이 다시 진언(進言)하길 '지금 성을 들어가지고 귀국했습니다만, 사방의 먼 곳에선 미처 알지 못하니 청컨대 거짓으로 성이 함락된 것이라 꾸미면서 무리를 이끌고 부리(符離)와 서주로 달려가게 해주신다면, 역적의 무리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매 모조리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강승훈이 이를 허락하였다. 숙주(宿州)의 옛 병사 3만명에게 강승훈이 기병대 수백명을 보태어주고, 모두에게 포상 ・위로하면서 그자들을 파견하였다.

장현임이 다시 성으로 들어가 저녁에 봉화를 보내는데 보통 날과 같았다. 기미일 새벽에 장현임이 장작 수천 묶음을 쌓아놓고, 불을 부쳐서 이것을 태우자 성이 함락되어 군대가 궤멸된 상황과도 같았으며, 직접 부리로 달려가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미 들어가 수장을 참수하고, 성안에 호령하자 모두 명령을 들었다. 그 병사들을 거두어 다시 1만명을 얻으매 북쪽의 서주로 달려갔다. 방거직과 허길이 소식을 듣고, 농성하고 막으며 지켰다. 신유일, 장현임이 팽성에 도착해 병사들을 이끌고 그곳을 포위하는데 병사를 어루만지면서 아직 공격하지 않은 채 우선 성위의 사람들한테 '조정에서는 오로지 역적의 무리를 주살하려는 것이고, 선량한 사람들은 해치지 않는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역적을 위해 성을 지키는가? 만약에 오히려 여우처럼 의심한다면, 순식간에 어육(魚肉)이 될 것이다!'라고 타일렀다.

이에 성을 지키던 자들이 서서히 갑옷을 벗거나 무기를 던지며 내려왔다. 최언증의 옛 관리인 노심중(路審中)이 성문을 열어 관군을 받아들이자, 방거직과 허길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자성(子城)을 지켰다. 날이 저물자 역적들이 북문(北門)으로부터 나왔고, 장현임이 병사를 파견해 그들을 추격하여 방거직과 허길을 참수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대부분 익사했으며, 계주(桂州)를 지켰던 자들의 친족도 모조리 붙잡혀 참수당해 죽은 자가 수천명이었고, 서주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방훈이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석산(石山, 안휘성 탕산현)의 서쪽으로 나오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약탈하여 남기지 않았다. 경신일, 강승훈이 비로소 알게 되어 보기(步騎) 8만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그들을 공격했는데, 주사적심(朱邪赤心)으로 하여금 기병대 수천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도록 했다.
 
방훈이 송주를 습격하여 그 남쪽의 성을 함락시키자, 자사(刺史) 정처충(鄭處沖)이 북쪽의 성을 지켰으며, 적들은 방비가 된 것을 알고선 버리고 떠나서 변하(汴河)를 건너가 남쪽의 박주를 노략하니, 사타족이 추격해 따라잡았다. 방훈이 병사를 이끌고 환수(渙水)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장차 팽성으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사타족에게 압박을 받아 마시거나 먹을 틈조차 없이 기현(蘄縣)에 이르러 강을 건너가려 하였다. 이곤(李袞)이 다리를 들추고, 군사를 챙겨서 이들을 막았다. 적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갈 곳도 알지 못하면서 현(縣)의 서쪽에 도착했으나, 관군이 크게 집결했다가 멋대로 공격했다. 적들을 죽인 것이 거의 1만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익사해버려 투항한 자는 겨우 1천명에 미쳤다. 방훈도 죽었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다가 수일만에 마침내 그의 시신을 찾았다.

적들의 숙천(宿遷, 강소성 숙천시) 등의 여러 영채가 모두 그곳의 수비 대장들을 죽이고 투항했다. 송위 역시 소현(蕭縣)을 탈취하였는데, 오형(吳迥)만이 홀로 호주(濠州, 안휘성 봉양현)를 지키면서 함락되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장현임을 우교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했다. 마거가 호주를 공격해 여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성안의 식량이 소진되어 사람을 죽여서 그것을 먹었고, 수비군은 해자를 깊숙이 파서 여러 겹으로 에워싸며 이를 지켰다. 신축일 밤에 오형이 포위망을 돌파해 달아나자, 마거가 병사들을 챙겨서 적들을 추격해 죽이거나 붙잡으면서 대부분 다 없어졌고, 오형은 초의(招義, 안휘성 명광현)에서 죽었다. 강승훈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동평장사(同平章事)로, 두도(杜慆)를 의성절도사(義成節度使)로 임명했다.

황상(皇上, 唐懿宗)은 주사적심의 공로를 가상히 여기어 운주(雲州, 산서성 대동시)에 대동군(大同軍)을 설치하고, 주사적심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불러서 접견하고, 머물도록 하면서 좌금오상장군(左金吾上將軍)으로 삼아 '이국창(李國昌)'이란 성명(姓名)을 하사했으며, 포상을 내어줌이 대단히 후했다. [이들 산서 군벌이 五代 後唐을 건립한다] 신당(辛讜)을 박주자사로 임명했다. 신당이 사주에 있으면서 포위를 무릅쓰고 병사와 양식을 내거나 맞이했는데, 갔다가 돌아옴이 12차례나 되었다. 박주에 제수되면서 신당이 상표(上表)하여 '신(臣)의 공로는 두도가 아니었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화주(和州)자사 최옹(崔雍)에겐 자진(自盡, 自殺)의 명령이 내려졌고, 가속(家屬)은 강주(康州, 광동성 덕경현)로 유배되었으며, 형제 5명도 모두 관직이 강등되어 먼 곳으로 보내졌다.

함통 11년(870) 여름 4월, 서주의 역적 가운데 잔당들이 오히려 여리(閭里)에서 서로 모여서 도적떼가 되었고, 연주(兗州) ・운주(鄆州) ・청주(青州) ・제주(齊州) 사이에 흩어져 살았다. 조서로 서주관찰사 하후동(夏侯曈)에게 그들을 초유(招諭)하도록 했다. [이들 상당수가 왕선지 ・황소의 난에 가담함] 5월에 황상이 백관(百官)들로 하여금 서주의 마땅함을 처리하도록 논의했다. 6월 병오일에 태자소부(太子少傅) 이교(李膠) 등이 상황을 아뢰었다.



"서주에서 비록 누차 화란(禍亂)을 강구했으나, 아직은 집집마다 반드시 완고하거나 흉악하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통제하여 다스릴 사람을 상실한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이 간사한 자에게 이르러 틈을 타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 명칭을 비록 강등시키더라도, 병사의 숫자가 아직 잔존해 지군(支郡, 번진에 예속된 고을)으로 삼으면 군량을 공급할 수 없을 것이며, 나누어 다른 번(藩)에 예속시킨다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옛날의 악당들이 서로 구제한다면, 다시 미쳐서 날뛰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로지 사주와는 일전에 연달아 공격하거나 수비했기 때문에 틈이 맺어진데다 이미 깊어졌으니, 마땅히 고쳐서 늘어놓아 양측 모두가 편하게 해야 합니다."



조서로 이를 따랐다. 서주는 옛날과 변함없이 관찰사로 삼았고, 서주 ・호주 ・숙주 3주를 통괄하되 사주는 단련사로 삼아 잘라서 회남에 예속시켰다. 겨울 11월 정묘일, 재차 서주를 감화군(感化軍)으로 삼고, 절도사를 두었다.




                서주(徐州) 전경, 사방이 구릉으로 에워싼 화북평원 동남부의 분지이자 역대 군사적 요충지였다.
                함통연간에 이곳을 거점삼아 궐기한 방훈병란(龐勛兵亂)은 당제국 몰락의 서곡이 되었다.




덧글

  • jaggernaut 2015/08/20 09:57 # 답글

    관중과 하남의 생산력이 확 낮아지면서 각 번진을 제압할 수 있는 중앙의 힘을 확보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난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한때 코끼리, 코뿔소까지도 살았던 아열대림이 존재하던 관중의 자연환경이 악화된 다음부터야 수를 쓸 수도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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