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박사(市舶司)를 통한 송나라의 대외개방 세계사








강남의 항주만(杭州灣)과 천주(泉州) 지역은 연안의 굴곡이 심하고, 섬이 많아 고대인들의 해상활동에 상당히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절강에서 발원한 월인(越人)들은 자고로 배를 잘 다루기로 유명하다. <회남자(淮南子)>의 제속훈(齊俗訓)에서도 '호인(胡人, 匈奴)은 말을 잘 다루며, 월인은 배를 잘 다룬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특히 명주(明州)의 지위는 남송시대 도읍인 항주와 동등하게 중요시되었는데, 항주만은 중국 연안의 남북(南北)을 이어주는 항해상의 물목이었다. 남방에서 올라온 선박들이 이곳을 통과해 북상하거나, 대운하를 거쳐서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남방의 모든 물자들은 이곳을 통과해야만 내지(內地)로 팔려나갈 수 있었다. 북방에서 남방으로 내려간 물자도 마찬가지였으며, 대운하를 통해서 실려온 물건은 항주나 명주에서 뱃길을 탈 수밖에 없었다.

송조(宋朝)는 당조(唐朝)의 제도를 계승하여 주요 항구에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고, 대외무역 사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송대의 주요 항구는 광동의 광주(廣州), 복건의 천주, 절강의 명주와 온주(溫州), 밀주(密州) 등을 꼽을 수 있다. 무역선에서 받아내는 조세 수입은 송원(宋元) 왕조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의 일환이었다. 송대에는 대체로 상선에 선적된 하물의 1/15 내지 2/10을 세금으로 징수했는데, 원대에는 1/30 내지 2/10를 징수하였다. 중국의 시박 제도는 당대 초기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기원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우선 태종(太宗) 정관(貞觀)연간 기원설로 이는 청초(淸初)의 고증사학자 고염무(顧炎武)가 정관 17년(643년), 3로박사(三路舶司)에 조서를 내렸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책부원구(冊府元龜)>의 현종(玄宗) 개원 2년(714)조 기사에 근거한 가설이다.

이상의 두 가지 설은 모두 정론으로는 부족하다. 고염무가 비록 저명한 사학자라고는 하지만, 그의 설명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일례로 당대 성구(省區)의 설치는 '도(道)'이며, '로(路)'라고 칭하지 않았다. '三路舶司'는 송대 광동 ・복건 ・절강의 시박사에 대해 간단히 지칭한 것이다. 정관 17년의 일은 <송회요(宋會要)>의 기재나 남송 소흥(紹興) 17년(1147), 박사(舶司)에게 내린 조서의 사료를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고염무의 명성 때문에 <광동통지(廣東通志)> 등에 잘못 기재된 것이 전해져 현재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개원 2년의 기사도 시박사의 기원을 논한 것은 아니고, 다만 광주 시박사의 관원들이 기기(奇器)를 거짓으로 꾸며대 출사했다고 널리 알려져 탄핵받았다는 내용이지만, 적어도 이로써 시박사가 개원연간 이전에 설치되었다는 점만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시박 제도의 정확한 기원이 불명료하지만, 이미 당대 초기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엔 이론이 없다. 해상무역의 발전에 따라 관(官)이 장악한 해외무역의 전문기구인 시박사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나타났다. 당조가 광주에 시박을 설치한 연대가 대략 고종(高宗) 재위기였고, 이때부터 광주의 페르시아 혹은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영남(嶺南)까지 와서 통상하고, 거주했다. 당대의 대외에 실행한 개방정책에 편승해 경제무역 교류를 장려하면서 결호사(結好使) ・압번박사(押蕃舶使) ・감박사(監舶使) ・시박사(市舶使) 등의 관제도 출현했으며, 권위있는 칭호로 시작되어 당현종 개원 ・천보(天寶)연간에 시박 체제의 기본이 형성되었다. 사서에 따르면, 당대에 시박사가 설치된 항구는 교주(交州) 및 광주 뿐이었다. 교주는 지금의 베트남 북부로 고대부터 영남의 주요항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위진(魏晋)시대 이래 광주의 지위가 점차 상승하기 시작해 당대에 와서 교역량이 교주를 능가하면서 중국 최대의 대외무역항이 되었다. 덕종(德宗) 때의 재상 육지(陸贄)는 '영남에서 안남에 시박중사를 설치하도록 요청한 주장의 상소(論嶺南請于安南置市舶中使狀)'라는 상주문에서 조정이 중사(中使)를 파견해 교주 시박을 관장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시박의 지위는 중요성이 날로 증가되어 8세기 중엽부터 점차 주(州)의 자사(刺史)와 대등해졌고, 곧 자사보다 상위직이 되었다. 거기엔 조정에서 때때로 직접 환관을 임명 ・파견해서 시박 업무를 관장했던 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송대는 중국 역사상 '중상주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국내외의 무역 전체가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올라섰다. 시박 제도로 대외 개방을 가장 활발하게 실시, 전형화 ・체계화된 시기도 송대였다.

송태조(宋太祖) 개보(開寶) 4년(971), 광주에 시박사가 다시 설치된 것을 위시로 진종(眞宗) 치세엔 항주와 명주에도 연이어 시박사가 건설되고, 철종(哲宗) 원우(元祐) 2년(1087)엔 복건의 천주에도 시박을 세웠다. 이처럼 주요 항마다 시박사가 설치된 이외에 다시 몇몇 새롭게 일어난 작은 항구들에도 박무(舶務)와 박장(舶場)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지사에 해당된다. 항주 ・명주 ・수주(秀州) 3주의 시박사 및 남송대부터 가동된 온주 ・강음(江陰)의 시박사는 양절로(兩浙路) 관할에 소속되었는데, 이는 전체 시박사의 반수 이상을 점유하는 수치로 양절로가 대외무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항주와 명주는 명실상부한 중심 무역항으로 <송사(宋史)> 지리지에선 '여항(餘杭)과 사명(四明)은 외국과 무역을 하면서 외국의 보물들이 조정의 창고에 가득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송대 최초의 시박사는 태조가 남한(南漢)을 평정한 직후 반미(潘美)로 하여금 시박 업무를 재개하도록 조치한데서 유래된다. 그후엔 상술했듯이 항주와 명주, 천주와 밀주 등에도 연이어 설립되었다. 시박사에서 올린 수입은 매년 증가 일로로 주요 세입원이었는데, 영종(英宗) 치평(治平)연간 매년 63만관(貫)이었던 것이 고종(高宗) 소흥연간에 오면 2백만관으로 급증했다. 송대의 주요 수출품은 비단과 도자기로 요업(窯業)의 발달에 힘입어 도자기가 수출의 주종을 형성하게 되었다. 수입품의 대부분은 동남아에서 산출된 향신료이며, 약재로 활용되어 향약(香藥)이라고도 불렸다. 이를 판매한 무역상은 대식국 상인들로 북송시대 향료의 연간 수입은 40만관, 전국 세입의 2% 정도였으나, 강역(疆域)이 강남으로 치우쳐 세수가 격감되고, 교역 의존도가 심화된 남송대엔 5~10%로 증가했다.

대외무역의 비중이 커지는데 보조를 같이해 시박사의 업무상 기본 직능도 상세해지고, 명확해졌다. 송대에 제정한 수출입 무역을 관리하는 '시박조례(市舶條例)'는 무역 법규이며, 내용도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그것을 실행하는데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원대의 시박조례의 기본이 되었다. 송대 시박의 직능은 다양하나,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공빙(公凭)을 반포해 수출입 상선들은 반드시 당국에서 발행한 공빙을 소지했을 경우에만 입항과 출항을 허용해 주었다. 외국 상인은 일종의 허가증인 공빙을 받아야만 경사(京師, 都城)에 가서 상업을 할 수 있도록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1104)에 공포되었다. 번상(藩商) 및 출생지가 중국인 외국의 상인이 시박사에 신청서를 제출해서 금수품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를 받아야 하며, 시박사는 반드시 중앙 상서성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앞서 원풍(元豊) 3년(1080)엔 '시박법(市舶法)'을 반포해 '상인이 해외 번국(蕃國)에 나아가 통상하는 자는 시박사에 가서 관권(官券)을 발부받아야 하며, 위배한 자는 보화(寶貨)를 몰수한다'고 했으니, 관권 즉 공빙을 발급받아 해외 통상을 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둘째는 압해(押解) 징세로 당대에 수출입 화물에 대해 이미 박각(舶脚)과 하정(下碇) 등의 명칭이 있었다. 외국 선박은 항구에 이르면 통보하고, 시박사가 물품을 기록하면서 수입세를 징수했다. 납박각(納舶脚)이란 바로 수입세를 징수한거다. 송대의 박각 세율은 일반 화물 세율의 1/10이었다. 소흥 17년(1147) 11월, 고종은 재차 조서로 '3로시박사(三路市舶司)는 이후 번상이 용뇌(龍腦) ・침향(沈香) ・정향(丁香) ・백두구(白豆蔻)를 판매하는데 옛 압해에 의거해 1분하도록 하며, 나머지는 구법(舊法)에 따라 시행한다'고 강조하였다.

송대의 세율은 1/10이며, 그 근거는 당나라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송대에 징수한 수입세를 '押解'라 부른다. 물건은 조(組)와 세(細)의 두 가지 색(色)으로 나누어 압해하며, 조색은 일반 화물을 가리키고, 세색은 귀중 수입품이다. 북송 초기 진주 ・용뇌류는 세색 화물에 속했는데, 매번 5천냥을 1강(綱)이라 일컬어 지방 시박으로부터 중앙의 각역원(榷易院)으로 송달되었다. 상품경제의 발전에 따라 송태조는 당대 이래 비전(飛錢)의 환거래 방식에 근거해 민간이 수도의 재정 부문[藏庫]에 돈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고, 정부가 일종의 증권을 발행해주어 이 증권을 지닌 사람은 유관한 지방의 주부(州府)로 가서 현금으로 받았다. 개보 3년(970), 송조는 편전무(便錢務)라는 명의의 전문적인 환거래 기구를 신설했는데, 이는 화폐 교환에 적응하며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이바지했다.

셋째는 금각(禁榷)과 박역(博易)이다. 시박사는 해관(海關)과 수출입 업무가 더불어 결합된 직능 기구이다. 공빙을 발급하거나 수입제를 징수하는 것은 본래 해관의 직능으로 금각[專營]과 박역[賣買]은 오히려 수출입 업무이지만, 두 가지 모두 시박사가 주관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시박사는 수입된 조 ・세색화물에 대해 1/10~2/10만을 압해하고, 나머지 부분은 금각 화물인지의 여부를 확인하되 만약 금수품에 해당될 경우엔 바로 시박사가 국가를 대표해 전부 수매하였다. 금수품에 해당되지 않더라면, 물품의 좋고 나쁨에 근거해 조정의 수요에 적당하게 맞추어 수매하였다. 수매 후의 나머지 금액과 비(非)수매 화물은 민간 무역을 허락했다. 시박사는 국가와 상인을 위한 기구로 그 자금의 근원은 조정에서 대여한 '절박본전(折博本錢)' ・'박역본전(博易本錢)' 혹은 '시박본전(市舶本錢)'이다.

넷째는 호시(互市) 초빙이다. 송고종(宋高宗)이 소흥 16년(1146) 9월 25일자 상유(上諭)에서 지적한 바대로 '시박의 이로움은 국가에 자못 도움이 되기 때문에 멀리서 외이(外夷)들을 끌어들여 재화를 많이 통용'시키면서 시박사의 재정 수입을 늘려보고자 모색한 것이다. 외국 상인이 중국에 거류하면서 합법적인 권익과 보호를 받도록 배려하고, 그들에게 일정한 예우도 부여했다. 국경을 떠나 바다로 나가는 선박에 위로연을 베풀고, 번한강수(蕃漢綱首, 貨主) 및 선장과 선원들의 환심을 사면서 그들로 하여금 국내로 들어오도록 회유하는 일종의 투자 유도책이었던 것이다. 광주 시박사나 복건 시박의 연간 총수입이 약 2백만관이었던데 반해 연회에 충당된 경비는 3백관에 불과했으므로, 외국 상인에게 음식과 안무를 대접하며 연회를 베풀어 준 행사도 자국의 이익을 고려해 준비된 계산이었다.




               절강성 영파(寧波) 근해의 명주항(明州港), 주산군도(舟山群道)와 마주한 동남 최대의 무역항이다.
               수당시대 이래 중국과 동남아시아 ・조선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항로의 발착지로 번성해왔다.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백제(白堤) 전경, 풍광명미(風光明媚)한 경치로 지상낙원이라 칭송되었다.
              5대 오월국(吳越國) 및 남송의 국도(國都)로 기능하며, 인구 120만을 상회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천태산(天台山)의 국청사(國淸寺), 남조말(南朝末) 승려 지의(智顗)가 수행한 천태종의 성지이다.
                당대 이후 대륙으로 건너온 사이초(最澄) 등의 일본인 승려들도 이곳에서 경전을 구해갔다.  




덧글

  • jaggernaut 2015/09/01 20:16 # 답글

    물질문명으로는 송대에 황금기를 찍고 기울어만 갔던...

    아쉬운 것은 은행제도나 법인을 이용한 회사제도 같은 법률적, 제도적 장치가 중국에서는 제대로 발전하지 않은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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