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FK 보좌관의 수카르노에 대한 단상 발언록








발전 도상에 있는 아시아 제국(諸國) 가운데 인도는 여전히 가장 이성적인 국가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영국이 2차대전 전후(戰後)에 이룩했던 바와 같은 숙련된 솜씨로 제국(帝國) 체제에서 탈피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 때문에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에서 민족주의자들의 반항은 극심한 분노에 찬 것이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1949년, 인도차이나는 특히 비참한 전쟁 경험을 치루고 1954년 각각 독립을 쟁취했다. 자카르타에서는 수카르노 대통령이 민족주의가 고조되던 당시의 감정을 한 몸에 모으기 시작했으며, 지체없이 이 민족주의적 감정을 활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확립시켰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캄보디아 및 라오스가 서로 다른 노선을 걸어갔다. 그리고,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거해 국토가 양분됨에 따라, 이제는 서로 적대시하는 2개의 국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인도네시아 및 베트남에선 각자 다른 형태로 쉽사리 명확한 해답을 내리기가 어려워졌으며,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를 괴롭히게 된 여러 문제들을 가로놓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수카르노는 1950년대 표명한 '교도(敎導) 민주주의[Guided Democracy]'로 국가를 통치해오고 있었지만, 그것은 해를 거듭하면서 변모하더니 마침내 제멋대로의 개인적 독재정치로 귀결되고 말았다. 독립전쟁의 영웅인 수카르노는 국민들의 숭배를 받았고, 그들의 존경심 위로 버티고 앉은 위대한 선동가였다. 백인들의 유럽에 대해서 가진 그의 뿌리깊은 불신감은 예상해 보건대 1958년 그를 타도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으로 알려진 CIA에 대한 감정에 기반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국내 문제는 지극히 복잡하고도 방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카르노는 그러한 모든 사안들을 아무렇게나 취급했다.

독재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듯이 그도 외교적인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국내 문제를 덮어두려고 했다. 1961년, 뉴기니 서부[이리안자야]에 잔존한 네덜란드령 식민지를 공격하려는 태세를 드러낸 것이다. 그해 봄, 수카르노는 워싱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9월에 베오그라드에서 회담을 마친 후 재차 워싱턴을 방문했는데, 케네디와의 회담은 그다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없었다. 이 인도네시아 지도자의 허영심은 숨길 수가 없었고, 이성적인 대화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카르노는 머리가 비상한 지적이고도 세련된 정치가였으나, 국제 무대에서 지나치게 포즈를 취하였다. 게다가 방탕한 사생활로 자국의 발전을 촉진시킬 기회마저 상실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케네디는 1억의 인구를 보유한데다, 석유와 주석 ・고무가 풍부한 인도네시아를 아시아 주요국가의 하나로 간주했다.

대통령은 인도네시아가 공산 진영으로 접근해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간절히 원했다. 수카르노가 뉴기니 침공에 필요한 군비 원조를 확보하고자 모스크바를 방문한다는 사실을 케네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수카르노의 신상에 돌발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세력이 막강한 공산당에 정권을 탈취당하지 않도록 반공파(反共派), 특히 인도네시아 군부를 강화시키는 방안을 희망했다. 1962년 2월에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채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수카르노와 법무장관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이야기가 통했다. 무엇보다 로버트의 솔직함이 자카르타에선 호의적으로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무렵에도 법무장관은 인도네시아 지도자들과 효과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미국인이 되었다.

케네디는 로버트의 특사 방문을 계기로 호전된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4월 2일, 데 쿠아이(De Quay) 네덜란드 수상에게 전달된 친서를 통해 케네디는 자결권 투표의 실행을 주장하는 헤이그 정부에 양보를 종용하는 한편, 수카르노를 계속 자극했다간 공산주의자들만 이로울 뿐이라는 논조로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조처로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호감을 샀음은 물론, 그들의 시선을 국내로 돌리도록 했으며, 경제 개발에 노력하게끔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국내 안정을 위하여 원조 제공의 의사까지 밝혔다. 이렇게 형성된 우호관계는 얼마간 지속되었다가 수카르노가 말레이 연방을 다음 타겟으로 삼자,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인도네시아에 대항해 말레이와 보조를 맞추면서 추세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며, 마침내 수카르노를 UN에서 축출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 By 아서 M. 슐레징거 2세(Arthur M. Schlesinger, Jr)




               바타비아 총독 궁전에서 회동한 드레이스(Drees) 네덜란드 총리와 벨(Beel) 판무관, 1949년 1월 8일
               노동당과 가톨릭 보수파의 연립정권을 수립, 전후(戰後) 사회의 재건을 설계했던 양대 거목이다.
    

               홀란디아(Hollandia) 비행장에서 해병대를 사열하는 플랏텔(Platteel) 뉴기니 총독, 1958년 6월 18일
               친(親)네덜란드 자치정부를 수립시켜 남태평양의 거점을 유지하려던 계획으로 분쟁이 촉발됐다.


              독립전쟁 무명용사 기념탑을 참배한 하멩쿠부워노 9세 부통령과 수하르토 부처, 1974년 11월 10일
              수카르노가 제창한 판차실라 5대 원칙은 신질서 시대, 자바 민족주의 팽창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덧글

  • 명탐정 호성 2015/11/12 19:55 # 답글

    저 시대에 저런 컬러 사진이!
  • 心月 2015/11/14 00:04 #

    천연 컬러사진의 기원이라면 오토크롬이 출시된 1차대전 이전까지 소급할 수 있습니다.ㅋ
  • 이파네마 2015/11/12 23:26 # 삭제 답글

    늘 흥미로운 글과 귀중한 사진 감사합니다.
  • 心月 2015/11/13 23:34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ㄷㄷ 2015/11/13 02:04 # 삭제 답글

    서부 뉴기니, 몰루카를 너무 쉽게 손에 넣었던 탓인지 말레이시아를 너무 만만하게보다 그대로 몰락...
  • 心月 2015/11/13 23:41 #

    분별없는 외교도 한 몫 했지만, 공산당과 어설픈 균형 시도했다가 동귀어진 당해버린 것이 결정타였죠.
  • ㄴㄴㄹㄹ 2015/11/13 10:41 # 삭제 답글

    저지랄하려고 싱가폴에서 테러 저지르다 좆망
  • 心月 2015/11/13 23:41 #

    그러고선 '위험속에 살았던 한 해'라며 자위질.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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