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젠하워 시대엔 대통령이 외국의 지도자들과 만나는 것이 업무 수행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은 친선을 목적으로 한 외교에 치중했으며, 그밖의 사안은 전문가에게 일임되었다. 그러나 케네디 시대가 되면서부터 친선과 의례적인 행사로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외교 실무까지도 취급하게 되었다. 사실 케네디는 그러한 형식적인 방문이나 인사 치레에 대해선 [후임자 LBJ와 마찬가지로]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외국의 지도자들이 자국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또한 상대방이 미국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혹은 이해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지속적으로 그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던 것이다. 케네디는 아주 잘난 체하고, 동작도 느릿한 점잖빼는 유럽의 방문객들과 만났을 경우엔 지루함을 느끼기 일쑤였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나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서 온 손님에 대해선 아주 기분좋게 장시간 서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러한 노력이 특히 아프리카에서처럼 눈부신 성공을 거둔 곳도 없었다. 1961년 3월, 가나의 은크루마를 포함해서 아프리카 정상들이 꼬리를 이어 백악관을 찾아왔다. 1961년에 11개국, 62년에 10개국, 63년에 7개국의 지도자들이 워싱턴을 방문했던 것이다. 케네디는 이러한 신생국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국가를 독립시키겠다는 희망이야. 유럽에서 친구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서까지 민족주의 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말리(Mali)와 기니(Guinea)는 공산주의로 경도되었던 것을 상쇄시킬 만한 민족주의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어.' 한 마디로 그는 유럽 식민 세력의 친구가 아닌 미국인으로서 이야기했다.
그는 개방적인 솔직함으로 방문객들에게 살갑게 대하면서 제반 문제에 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는데, 이런 식이었다. '당신은 독립을 쟁취한 지금, 나라 내부에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국가들의 국내적인 압력이 때로는 지도자의 의사와는 반대되는 일을 강제[일례로 반미적인 것]하는 경우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케네디는 세계가 자신에겐 국내 정치의 연장 선상이라는 생각을 가진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방문객에게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설교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방문객의 존엄성에 완전한 경의를 표하면서 불가능한 일을 부탁하거나 실천할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자신과 상대방이 함께 일할 만한 광장을 찾았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더라도 피차 그 이유를 납득하고, 경의를 표하도록 노력했다.
나토에 가입한 동맹국과 신생 아프리카 제국간에 연관된 제반 권리의 균형을 측정하는 것은 항시 어려운 일이었다. 1961년 3월, UN에서의 앙골라 결의에 관한 투표는 장기간 식민 세력을 일관해서 묵인해왔던 기존의 입장으로부터 미국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국무성 내부에선 유럽파와 아프리카파 인사들이 서로 경합하며 대립중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결단엔 그만큼 애로 사항이 많았다. 이같은 사정을 배경으로 케네디는 임기 첫해의 수개월 동안 알제리와 쿠바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보내야 했다. 드골이 미국에 알제리의 독립 계획을 인정하게끔 노력한 것을 케네디는 호의적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해 4월에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 장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시 드골에게 원조를 확약했다. 반란이 진압되면서 드골은 마침내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의 비밀 회담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틈을 타서 튀니지도 비제르트(Bizerte)의 군사 기지로부터 잔류 프랑스인을 축출하고자 기도했다. 여기에 대해서 프랑스군이 대규모 공습으로 응수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UN에까지 제기되기에 이르렀고, 8월의 총회에서 튀니지 영내로부터 프랑스의 군사 세력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결의안이 검토되었다. 1년 후, 프랑스 주둔군이 비제르트에서 철퇴하면서 프랑스-튀니지 관계는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알제리의 독립도 실현되었다. 한편, 포르투갈령 식민지는 그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는 일제히 반란의 초기 상태를 야기시키고 있었지만, 포르투갈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저항해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며 강경하게 맞섰다. 그들의 논리인즉슨, '포르투갈엔 제국주의적 식민지가 없다. 법적으로 해외 영토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당초 UN에서도 포르투갈 영토 문제에 온건한 정책을 구사하면서 원론적인 조언만 건넸을 따름이었다. 리스본에선 그러한 조언에 대해서조차 주목할 만한 양보를 보이지 않다가 신생 아프리카 회원국들의 항의와 압력이 빗발치자, 1963년 여름에 마지못해 아프리카 각국 수뇌들과 회담 의제로 상정한다는데 동의했다. 포르투갈의 완고한 태도를 둘러싸고, 으레 아프리카 대표단은 총회 석상에서 맹렬히 공격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아조레스 제도의 공군 기지에 대한 딜레마를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이해시키는데 주의를 기울였으므로, 반미감정의 확산을 일단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신생국 수뇌부와 우호를 다지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처사라고 믿었던 케네디는 이를 '장기간의 투자'로 인식하고, 이윤이 회수될 때까지 약간 무의미한 일이 있더라도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2년 7월 3일, 즉 케네디가 상원에서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정책을 비난하는 연설을 가졌을 때로부터 정확히 5년 하루가 지났던 그날, 알제리는 자유를 얻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케네디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신의 상담역으로 평소 신뢰하던 외교관인 윌리엄 포터(William Porter, 67~71년 駐韓대사 역임)를 초대 알제리 주재 대사로 파견했다. 알제리는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으로 정치 지도자들의 성향이 매우 과격해져 있었으며, 정치 ・경제 ・행정 조직들은 황폐화되고 말았다. 신생 알제리에서 재빨리 지배권을 장악한 아메드 벤 벨라(Ahmed Ben Bella)는 혼란스럽고도, 분열된 국토를 수습해야 했다. 열혈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모든 전후(戰後) 처리를 무자비하게 실행해 나갔다. 그래도 이 과격한 알제리 역시 이전에 자신들의 투쟁 노선을 옹호했던 미국을 잊지 않았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일찍이 1960년 케네디 당선에 축하를 표명했음은 물론, 62년 벤 벨라가 최초의 중요한 외국 방문에 나섰을 때 먼저 워싱턴으로 직행했다. 그도 기타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케네디와 다정한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열렬한 케네디 지지자가 되었던 것이다. 알제리의 혁명 결과에 대해서 개인적인 모험을 걸었던 케네디는 특별한 관심으로 알제리의 노선을 주시했다. 그런데 벤 벨라는 보통 변덕쟁이가 아니었다. 카스트로에게 찬사를 보내는가 하면, 소련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추파를 드러냈다. 케네디는 이러한 벤 벨라의 변덕스러운 행태에 실망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구상을 변경시키진 않았다. 그는 알제리의 지나친 반(反)서구 감정이 주의(主義)라던가, 규율 같은 것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일종의 풍조로 그러한 것이며, 이 현상은 결코 오래가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때문에 미국은 현상을 유지하되, 벤 벨라가 자국민의 복지를 위하여 전면적으로 노력할 수 있게끔 배려하는 선에서 원조해야 한다는데 공감했다. 실제로 1962~63년 겨울에 알제리는 대(大)흉작을 맞아 공포에 떨고 있었다. 케네디는 즉시 식량을 긴급 수송했고, 덕분에 알제리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된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이는 상대방과 밀착해 일을 계속하면서 장래에 시기를 기다린다는 정책의 발로이기도 했다. 또다른 한편으로 나세르에 관해서는 아프리카 정책의 일부라기보단 중동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바, 중동 정책이 한층 복잡해진 배경엔 나세르가 품었던 아랍 패권주의 건설에 대한 꿈, 그리고 예멘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국가들에서 잔존한 중세적인 소수 전제정치의 부패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랍의 이스라엘에 대한 과도한 증오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케네디는 이스라엘의 안전 보장에 대해서 미국이 정신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 옳다는 신념하에 침략에 대항할 만한 무력을 이스라엘에 제공해줘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1956년 수에즈 전쟁 당시 외교전에서의 악몽을 설욕하려는 이스라엘의 대(對)이집트 강경책을 견제하고, 아랍의 온건파 세력과 보다 밀접하게 협력하고자 나세르의 발언권을 보류해 두고자 생각했다. 때문에 1961년 이집트와의 국가 통합을 파기한 시리아의 반(反)나세르 정부를 승인하고, 이듬해 이스라엘에 대공 미사일을 매각했을 때 케네디는 사전에 미국의 행동과 의도를 자진해서 이집트에 통보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멘 내전을 아랍 사회주의 선전장으로 활용하려는 나세르의 계획은 1960년대 미국-이집트 관계를 좌우하게 되었으며, 홍해 연안의 항행권 보장에 대한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서유럽 핵전력 증강 문제로 JFK와 논의중인 스틱케르(Stikker) 나토 사무총장, 1962년 2월 6일
백악관을 예방한 마테오스(Matoes) 멕시코 대통령 영부인과 환담을 나누는 JFK, 1963년 6월 14일
전후 네덜란드 외상으로 인도네시아 독립 및 나토와 석탄 ・철강 공동시장 결성을 주관했다.

제도혁명당(PRI)의 우경화 현상이 가속화된 60년대는 미묵(美墨)관계 사상 최고의 밀월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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