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4년 6월 13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와카노우라 마루(和歌浦丸)와 일본 혼성여단의 선발 대대
동학란 진압을 구실삼아 전날까지 청군(淸軍) 파견대도 아산에 상륙함으로써 전운이 고조된다.

연합함대 순양함 요시노(吉野)의 호위하에 선단이 항만으로의 상륙 준비차 대기중인 모습이다.


인천과 서울간 도로상의 길목인 성현산(星峴山, 비루고개)에 감시 초소를 차린 혼성여단의 병영

서울 만리창(萬里倉)의 일본군 임시 혼성여단 사령본부 앞에서 회동한 오시마 소장 이하 막료들



용산의 일본군 병참 사령부 전경, 6월 하순 만리창에 혼성여단 본대가 진주하면서 개설되었다.

본래 광동함대 소속이었으나, 개전 전야에 견습차 북양함대로 파견 ・동원되었다가 최후를 맞았다.

좌초된 광을호의 내부 전경, 갑판의 목재는 피격 당시의 화재로 전소된 채 철골만 드러나 있다.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 이하 다수의 일본 관헌이 마중나와 개선 부대를 영접했다.

문록(文祿)전쟁 이래 근 3세기만에 해외원정 정규전에서 일본 육군이 거둔 전첩으로 기록되었다.

2주 후 육로로 부산에서 올라온 제5사단과 합류하게 되면서 서울 이북으로의 진공을 개시했다.

주력과 후속 부대가 분산된 제5사단을 지원해가며 평양으로의 진공에 대비해 편성 ・파견되었다.


이 부근에서 오시마 혼성여단과 마옥곤(馬玉崑)의 의군(毅軍)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좌측 후방으로 평양의 최고 명승(名勝)인 연광정(鍊光亭)과 대동문(大同門)이 나란히 보인다.

보루 전면으로 청군이 버리고 간 장비들과 잔해가 널려졌는데, 총 35문의 야포가 노획되었다.


현무문 위에서 독전을 무릅썼던 좌보귀(左寶貴)의 전사는 평양성 함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평양으로 입성한 사단장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 중장이 이곳을 접수, 군무를 총괄했다.

평양 대동관(大同館)에 들어선 일본군 병참 사령부, 본래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의 객관이었다.

평양 공방전을 기점으로 청군이 조선반도에서 모두 축출당하자 전선은 남만주로 확대되었다.


평양 함락에 호응해 해상으로 출격한 연합함대가 북양함대 호송단과 조우하면서 일대 격돌했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북양함대의 초용(超勇)이 일격을 받아 침몰하는 모습도 어렴풋이 포착되었다.




문록전쟁 초기에 조선 국왕의 최후 피난처로 행재소가 설치됐으며, 만주와 인접한 요충지였다.

야마가타는 10월 25일 압록강을 횡단, 청국 영내로 진입해 구련성(九連城)의 공략에 나섰다.

덧글
처음보는 사진 많아 감사합니다. 청일전쟁 사진을 보면서 늘 느끼는 건데 무대가 된 조선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게(건물과 장소만 제공?) 참 맘이 아픕니다.
마지막 사진의 의주관아 앞의 조선관헌은 일본군과 사진을 찍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과연 그 당시 사람들에게 세상은 어떻게 보였을까 궁금합니다.
하지만 해군전술발전사상에 끼친 영향은 황해해전쪽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죠. 함대기동전, 속사포의 유용성, 포술지휘체제등등 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이 해전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해서 나중에 쓰시마에서는 러시아 해군까지 때려잡는데 성공했고요.
리사해전은...시대착오적인 충각의 부활을 불러오고 이중제국의 테게토프 제독이 명성을 얻은 거 외엔...(그리고 이탈리아군 안습 전설에 한 줄을 더하게 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