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36권下, 이극용의 등장과 사타 군벌의 흥기 세계사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5년(878). 진무절도사(振武節度使) 이국창(李國昌, 주사적심)의 아들 이극용(李克用)이 사타(沙陀) 부병마사(副兵馬使)가 되어 울주(蔚州, 하북성 울현)를 수비했다. 당시 하남(河南)의 도적이 봉기하자, 운주(雲州)의 사타 병마사 이진충(李盡忠)이 아장(牙將) 강군립(康君立) ・설지근(薛志勤) ・정회신(程懷信) ・이존장(李存璋) 등과 모의하면서 '지금 천하가 크게 혼란한데, 조정의 호령은 서방(西方)에서 다시 시행되지 않으니, 이는 바로 영웅이 공명(功名)을 세워 부귀해지는 시기다. 우리는 비록 각자 무리를 품고 있지만, 그러나 이진무(李振武, 李國昌)는 공로가 큰데다 관직도 높으며,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그 아들은 용감하기가 제군(諸軍)에서 으뜸이니, 만약 보필해 거사한다면 대북(代北)을 평정함으로도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무리들이 그러하다고 여겼다.

강군립은 흥당(興唐) 사람, 이존장은 운주(雲州), 설지근은 봉성(奉城, 내몽고 영성현) 사람이다. 때마침 대동방어사(大同防御使) 단문초(段文楚)가 수륙발운사(水陸發運使)를 겸해 대북에 줄곧 기근이 들면서 조운(漕運)이 이어지지 않자, 단문초는 자못 군사들의 의복과 쌀을 줄였고, 또한 법의 적용도 점차 준엄히 하게 되어 군사들은 원망하거나 화를 냈다. 이진충이 강군립을 비밀리에 파견해 울주에 이르러 이극용에게 군사를 일으키고, 단문초를 제거해 그를 대신하라고 유세했다. 이극용이 '내 아버님께선 진무(振武)에 계시니 내가 품신(稟申)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자, 강군립은 '지금의 기밀 사안이 이미 새어나갈 것이니, 늦춘다면 변고가 생기는데 어느 겨를에 1천리(里)까지 가서 명해달라 품신한다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이진충이 밤중에 아병(牙兵)을 거느려 아성(牙城)을 공격했다.

단문초와 판관(判官) 유한장(劉漢璋) 등을 붙잡아 옥(獄)에 묶어버리고, 스스로 지군주사(知軍州事)가 되어 사람을 보내어 이극용을 부르자, 이극용이 무리를 이끌고 운주로 달려가며 병사들을 거두었다. 2월 경오일, 성(城) 아래에 이르러 무리가 1만명이었고, 투계대(鬪鷄臺) 아래에 주둔했다. 임신일, 이진충이 사신을 파견해 부절(符節)과 인새(印璽)도 보내고, 이극용에게 청하여 방어유후(防御留後)가 되도록 했다. 계유일, 이진충이 단문초 등 5명을 포박해 투계대 아래로 보내자, 이극용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들을 저며서 먹도록 하고, 해골까지 짓밟게 하였다. 갑술일에 이극용이 부사(府舍)로 들어가 업무를 보았다. 장사(將士)들에게 상표(上表)하여 [방어사 직책을 정식으로 내리는] 칙명(勅命)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게 했지만, 조정에선 허락하지 않았다. 이국창이 조정에 상언(上言)했다.



"빌건대 조정에서 속히 대동방어사를 제수하는데, 만약 이극용이 명령을 어긴다면 신(臣)이 청하기를 본도(本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토벌해 끝내 한 명의 아들을 아껴서 국가에 죄를 짓지는 않도록 해주십시오."



조정에선 바야흐로 이국창으로 하여금 이극용을 타이르도록 하고자 했는데, 마침 그 상주문을 얻자 이윽고 사농경(司農卿) 지상(支詳)을 대동군선위사(大同軍宣慰使)로 삼아 이국창에게 조서로 '평소 의례대로 맞아들여 기다리면 이극용에게 관직을 제수하겠는데, 반드시 흡족하게 할 것이라고 이극용에게 말하도록 했다. 또한, 태복경(太僕卿) 노간방(盧簡方)을 대동방어사로 삼았다. 조정에선 이극용이 운주를 점거했으므로 여름 4월에 전직 대동군방어사 노간방을 진무절도사, 진무절도사 이국창을 대동절도사로 삼아 이극용이 반드시 항거하지 않도록 했다. 이국창은 부자(父子)가 양진(兩鎭)을 나란히 점거하고자 제서(制書)를 얻어 훼손시켰고, 감군(監軍)을 죽여 대리인을 받들지 않으며 이극용과 병사를 합쳐 차로군(遮虜軍)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영무(寧武)와 가람군(岢嵐軍)도 쳤다.

노방간은 진무로 갔다가 남주(嵐州)에 이르러 죽었다. 정사일, 하동(河東)절도사 두한(竇澣)이 백성을 징발해 진양(晋陽, 산서성 태원시)의 해자를 팠다. 기미일, 도압아(都押牙) 강전규(康傳圭)를 대주(代州)자사로 삼으면서 또한 토단(土團) 1천명을 징발해 대주로 가도록 했다. 토단이 성 북쪽에 이르자 부대를 정돈해 출발시키지 않은 채 후한 상을 요구했다. 당시 부고(府庫)는 공갈되어 두한은 마보도우후(馬步都虞後) 등건(鄧虔)을 파견해 그들을 위로하고 타이르자, 토단은 등건의 살가죽을 벗기고 그 시신을 상(床)에다 메고선 부(府)로 들어갔다. 두한이 감군과 더불어 스스로 나아가 위로하고, 타일러 1인당 300전(錢)과 포(布) 1단(端)을 지급해 무리가 진정되었다. 압아(押牙) 전공악(田公鍔)은 반란군에게 전포(錢布)를 주었는데, 무리들이 마침내 그를 겁주어 도장으로 삼아 대주로 가게 했다.

두한은 상인의 돈 5만민(緡)을 빌려 군사들을 도왔다. 조정에선 두한이 재주가 없다고 여겨 6월에 전직 소의(昭義)절도사 조상(曹翔)을 하동절도사로 삼았다. 사타(沙陀)가 당림(唐林)과 곽현(崞縣)을 불태워 흔주(忻州)의 경계로 들어갔다. 겨울 10월, 조서로 소의절도사 이균(李鈞)과 유주(幽州)절도사 이가거(李可擧)에게 토욕혼(土谷渾) 추장 혁련탁(赫連鐸)과 백의성(白義誠) 및 사타 추장 안경(安慶)과 살갈(薩葛) 추장 미해만(米海萬)의 군사들과 합쳐서 이국창 부자를 울주에서 토벌하게 했다. 11월 경오일, 가람군이 성을 뒤엎고 사타에 호응했다. 정미일, 하동선위사 최계강(崔季康)을 하동절도사 ・대북행영초토사로 삼았다. 사타가 석주(石州)를 공격하자, 경술일에 최계강이 이를 구원했다. 최계강과 소의절도사 이균이 이극용과 홍곡(洪谷)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이균은 전사했다.

소의군(昭義軍)은 돌아가 대주에 당도하면서 사졸들이 사납게 겁략했는데, 대주의 백성들이 그들을 죽여서 대부분 없어졌으며, 나머지 무리는 아명곡(鴉鳴谷, 산서성 흔주시 동북쪽)에서부터 달아나 상당(上黨, 산서성 장치시)으로 귀환했다. 광명(廣明) 원년(880) 봄 정월, 사타가 안문관(雁門關, 산서성 대현)으로 들어와 흔주와 대주를 노략했다. 2월 경술일, 사타의 2만여명이 진양을 압박했다. 신해일에 태곡(太谷)을 함락시켰다. 여주(汝州)방어사 박창(博昌) 사람 제갈상(諸葛爽)을 파견해 동도(東都, 洛陽)의 방어병을 인솔해 하동을 구원하게 했다. 여름 4월 정유일, 태복경 이탁(李琢)을 울(蔚) ・삭(朔) 등주초토도통(等州招討都統) 행영절도사로 임명했다. 이탁은 이청(李聽)의 아들이다. 이탁을 울삭절도사로 삼고 도통에 충임시켰다. 6월 경자일, 이탁이 사타 2천명이 항복했다고 상주(上奏)했다.
 
이탁은 병사 1만명을 거느리고 대주에 주둔했는데, 노룡(盧龍)절도사 이가거와 토욕혼 도독 혁련탁과 함께 사타를 토벌했다. 이극용이 대장 고문집(高文集)을 파견해 삭주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그 무리를 거느려 이가거를 웅무군(雄武軍, 하북성 흥륭현)에서 제지했다. 혁련탁이 사람을 파견해 고문집에게 귀국(歸國)하도록 설득하자, 고문집이 이극용의 장수 부문달(傅文達)을 잡아 사타의 추장 이우금(李友金)과 살갈 도독 미해만, 안경도독 사경존(史敬存)과 더불어 모두 이탁에게 항복하니, 문을 열고 관군(官軍)을 영접했다. 이우금은 이극용의 족부(族父)이다. 가을 7월에 이극용이 웅무군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삭주의 고문집을 공격하자, 이가거가 행군사마 한현소(韓玄紹)를 파견해 약아령(藥兒嶺)에서 그들을 요격해 대파하고, 7천여명을 죽이면서 이진충과 정회신도 모두 죽었다.

또한 웅무군의 경계에서 그들을 패배시켜 1만여명을 죽였다. 이탁과 혁련탁이 나아가 울주를 공격하자, 이국창은 패전하여 무리들이 모두 무너졌으며, 단지 이극용 및 종족들과 북쪽의 달단(達靼)으로 들어갔다. 조서로 운주자사 ・대동군방어사로, 토욕혼의 백의성을 울주자사로, 살갈의 미해만을 삭주자사로 삼고, 이가거에겐 겸시중(兼侍中)을 덧붙여주었다. 달단은 본래 말갈(靺鞨)의 별부(別府)인데 음산(陰山, 내몽고)에 거주했다. 수개월 후, 혁련탁이 몰래 달단에게 뇌물을 주어 이국창 부자를 잡도록 했는데, 이극용이 이를 눈치채고 종종 그들의 호수(豪帥, 지휘관)들과 사냥해 놀면서 말의 채찍이나 나뭇잎을 놓거나 혹은 바늘을 매달아 놓고, 활로 쏘아서 맞히지 못한 것이 없었기에 지휘관들이 마음속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또한 술상을 마련해 함께 마시면서 취하자 이극용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자(天子, 唐僖宗)께 죄를 지어서 충성을 다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지금 듣자하니, 황소(黃巢)가 북쪽으로 올라온다던데, 반드시 중원(中原)의 우환이 될 것이다. 어느 날, 천자가 만약에 나의 죄를 사면해 공(公)들과 더불어 남쪽으로 가서 대공(大功)을 함께 세운다면, 역시 유쾌하지 않겠는가? 누가 사막에서 늙어 죽을 수 있겠는가?!"



달단 사람들은 이극용이 남아있을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그를 해치려던 계획을] 그만두었다. 중화(中和) 원년(881), 대북감군(代北監軍) 진경사(陳景思)가 사타 추장 이우금과 살갈의 안경, 토욕혼의 여러 부족들을 이끌고 경사(京師, 長安)로 들어가 원조하게 했다. 구진(瞿稹)과 이우금이 진경사에게 이극용을 부르도록 유세하니, 이는 '황소의 난' 항목에서 볼 수 있다. 이극용이 하동에 통첩해 조서를 받들어 군사 5만명을 거느려 황소를 토벌한다고 칭하며 군대 숙박소를 설치하라 명령하자, 정종당(鄭從讜)이 성문을 닫고 여기에 대비했다. 이극용이 분수(汾水)의 동쪽에 주둔하는데, 정종당이 그들에게 물자와 식량을 지급했음에도 며칠 넘게 출발하지 않았다. 이극용이 스스로 성 아래에 도착해 큰 소리로 정종당과 상견하자며 요구하자, 정종당이 성에 올라가 이극용에게 사과했다.

4월 계해일에 재차 군대에 지급할 상을 내라고 요구하자, 정종당은 전(錢) 1천민과 쌀 1천곡(斛)을 그에게 남겼다. 갑자일, 이극용이 사타족들을 풀어놓아 거주민들을 표략하니, 성내에선 크게 놀랐다. 정종당이 진무절도사 글필장(契苾璋)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글필장은 돌궐(突厥)과 토욕혼을 이끌고 그를 구원해 사타의 두 요새를 격파했으며, 이극용이 추격해 싸우면서 진양성(晋陽城) 남쪽에 이르렀다가 돌아가고, 글필장이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갔다. 사타족은 양곡(陽谷)과 유차(楡次)를 약탈한 다음 떠났다. 6월에 이극용이 폭우를 만나자 기해일에 병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가면서 흔주와 대주 2주(州)를 함락시켰는데, 이어서 대주에 체류하였다. 정종당이 교련사(敎練使) 논안(論安) 등의 군사를 파견해 백정(百井, 산서성 양곡현 서북쪽)에 진지를 차리고, 그에게 대비하도록 했다.

가을 7월, 논안이 백정에서 멋대로 귀환하자 정종당은 신발과 옷도 벗기지 않은 채 그를 참수하고, 가족들도 모조리 죽였다. 재차 도두(都頭) 온한신(溫漢臣)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정에 주둔하게 했다. 글필장은 군사를 이끌고 진무로 돌아갔다. 중화 2년(882), 이극용이 울주를 침략하자 3월에 진무절도사 글필장이 천덕(天德) ・대동(大同)과 더불어 이극용을 토벌하겠다고 상주했다. 조서로 정종당에게 서로 알아서 응원하며 이어주라고 하였다. 이극용이 거듭 상표해 당나라 조정에 항복하겠다고 청했음에도, 흔주와 대주를 점거한 채 자주 병주(并州, 산서성 태원시)와 분주(汾州, 산서성 분양현)를 침략하면서 누번감(樓煩監, 누번현의 목장 감독관)과도 다투었다. 의무(義武)절도사 왕처존(王處存)은 이극용과 대대로 혼인해 왔는데, 겨울 10월에 왕처존이 이극용에게 유세하며 타일렀다.



'만약 성심(誠心)으로 귀부한다면 마땅히 삭주(朔州)로 돌아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겠지만, 횡포한 짓을 옛날처럼 한다면 마땅히 하동군(河東軍) 및 대동군(大同軍)과 더불어 공동으로 그대를 토벌해야 할 것이다."



행영도감(行營都監) 양복광(楊復光)이 왕중영(王重榮, 하중절도사)에게 정종당으로 하여금 조정의 뜻으로 사타를 불러 황소를 토벌하자고 설득했다. 왕탁(王鐸)이 흑칙(黑勅, 황제의 관리 임명장)으로 이극용을 부르자며 정종당을 타일렀다. 11월에 이극용이 사타족 1만 7천명을 거느리고 남주(嵐州, 산서성 남현)와 석주(石州)로부터 길을 따라 하중(河中)으로 달려갔다. 12월에 흔주와 대주 등의 유후(留後)였던 이극용을 안문(雁門)절도사로 삼았다. 이극용이 병사 4만명을 거느리고 하중에 도착해 황소를 토벌했으며, 나머지 일들은 '황소의 난' 항목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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