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측은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조선(朝鮮)'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위치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일까? 1947년 8월 4일자의 'SCAPIN 1757'에선 연합국 ・중립국 ・적성국의 세 범주외에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특수 지위의 국가(Special Status Nations)'가 신설되었고, 조선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태국 등과 함께 '특수 지위의 국가'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일본의 구(舊) 식민지이며, 그 시점에서는 연합국의 점령[=美 軍政]하에 있는 비(非)독립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미국은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한국을 어떻게 '취급'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1949년 11월엔 미 국무성에서 무초(Muccio) 주한(駐韓)대사에게 한국의 대일(對日) 강화회의 참가 여부에 대해 의견을 구했더니, 무초는 미 군정으로부터 신생 한국 정부로 인도된 '재한(在韓) 일본계 재산[=敵産]을 일본의 전체 배상으로서 받아들일 것'을 조건부로 한국의 대일 강화회의 참가를 인정하도록 권고했다.
12월, 국무성 극동 조사국은 '대일 강화조약에 있어서의 대한민국의 참가'라는 조사 보고서를 작성, <I. 대한민국의 참가 요구>, <II. 강화조약에 있어서의 한국의 이해(利害) 본질>,<III. 강화조약 회의에 있어서의 한국의 참가 불참가 결과>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우선 I에서 '합중국은 한국의 참가를 지원하는 명확한 서약을 주지 않았으며, 한국에 대한 배상은 한국의 직접적인 청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합중국 또는 다른 극동 위원회 소속의 나라에 할당된 배상에서 수여된다는 입장을 계속 주장해 왔다'고 하여, 한국이 강화회의에 참석해 배상을 요구하는 것에 반대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II에서는 한국측의 참가 요구는 1910년 '한국 병합' 이래 일본에 대하여 계속해서 '교전국가'로 있어 왔다는 지위에 근거하지만, '1910년의 조약에 의한 일본의 한국 병합은 합중국을 포함한 대부분 모든 국가에게 승인되어, 조선의 국가나 정부로서의 전체적 승인은 1948년이 될 때까지 부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조선내에서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은 '지방'에서의 '단기간의 소요'에 한정되었고, 사람들은 대체로 총독부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선 국외의 민족주의 조직들은 공식적으로 승인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조선 국내에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서 한국측의 주장에 반론했다. 국무성이 강조한 것은 강화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이해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교전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1910~45년까지의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에 거의 전적으로 유래하는 것'이며, 미국이나 다른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한 것이기 때문에 식민 통치에 대한 한국의 배상 요구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III에서 한국측의 '반환 ・배상 청구가 과도'하며, 극동 위원회가 한국의 배상 청구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상 청구권이나 재일(在日) 조선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해 오는 등 한국이 강화회의에 참가할 경우의 문제점을 제시했다.
결국, 이 보고는 강화회의 참가 여부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피하되, 한국을 옵서버(Observer)로 참가시키면서 '어느 정도'의 청구권을 인정하는 타협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국무성이 작성한 강화조약 초안엔 한국도 서명국으로 추가되어 있었는데, 1951년 봄의 미영(美英)간 협의에서 한국의 참가에 반대한 영국의 입장이 수용되어 한국의 강화조약 서명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것은 향후 일한(日韓) 교섭에서 한국에 불리한 틀을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강화조약 서명 문제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던 일본의 '한국 병합'은 합중국을 포함한 대부분 모든 국가들로부터 승인되었다는 미국의 식민지 지배 인식이다. 강화조약의 최종 초안이 확정되어가던 1951년 7월 3일의 국무성 작성 파일엔 '일본의 조선 통치와 지배로 발생한 청구권을 해결'하기 위한 '반환(restitution) 청구권, 혹은 배상(reparations) 청구권'은 과도하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약 3억$이라 평가되는 이 청구권은 1909~45년 8월 9일까지 조선에서 약탈되었다고 신고된 지금(地金) ・지은(地銀), 미술품 ・특수한 출판물, 전시 중 살해된 조선인에 대한 보상, 전시 중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대한 미불(未拂) 임금 등으로 이루어진다. [중략] 조선은 1948년 7월 28일 개최된 약탈 재산의 반환에 대한 극동 위원회의 결정에 있어서 이익이 주어질 대상이라고는 간주되지 않았다. 2차대전 중에 일본에 의해 점령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1948년의 극동 위원회의 결정에 근거해 '일본의 조선 통치와 지배로 발생한 청구권'은 기본적으로는 용인할 수 없다고 하는, 앞의 1949년 12월 보고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에 더하여 한국측의 '청구권'은 '상호 협정의 특별한 기초 위에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으며, '조선에서 반출된 문화재를 일본이 한국에 반환하고, 일본의 조선 점령으로 인해 발생한 한국인의 청구권을 위한 어느 정도의 일반적인 보상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고려'되지만, 그것은 '국제연합 한국 부흥기관에 대해 일본이 자발적으로 공헌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이것은 강화조약 제4조에 규정된 '특별 협정'을 부연 설명한 것이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이나 다른 국가들이 '한국 병합'을 승인했었기 때문에 식민지 통치 자체에 대한 한국측의 배상 요구는 용인할 수 없다. 2. 그러나, 일본의 조선 점령으로 인해 발생한 한국인의 어느 정도 일반적인 보상, 문화재 반환에 대해선 고려되어야 한다.
한국측의 '청구권'은 '상호 협정의 특별한 기초 위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3. 그것은 '유엔 부흥기관에 대하여 일본이 자발적으로 공헌하는 형식을 취한다. 1과 2는 강화조약 제4조에 규정된 특별 협정을 부연 설명한 것이었고, 일본의 '보상'을 유엔 부흥기관에 대한 '경제 원조'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미국의 대처 방침은 어떠한 인식에서 도출된 것일까? 강화회의 준비와 조약 작성을 주도한 존 F. 덜레스(John F. Dulles)의 식민지 지배 인식이 그 단서를 제공해준다. 덜레스는 1950년에 출판한 저서 <전쟁이냐, 평화냐(War or Peace)>에서 구미의 식민지 지배 역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과거 수세기 동안 서구 각국이 '물질적 ・지적 ・정신적으로 활발함'을 유지한 결과, '미개발 지역'에 대해 차관이 주어져 '철도 ・항만 ・관개 사업 및 기타의 형태로 거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선 '정치적 안정이나 통화(通貨)의 교환성'에 관하여 충분한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서구 각국은 '무역이나 투자에 필요한 정치적 안정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세계의 사람들을 위해서 통치를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는 서구 각국에 의한 '화려한 정치 활동의 무대'였다. 서구의 지배가 전세계로 확대된 것은 이러한 '서구 각국의 정치적 우월성' 때문이었다. '원래 서구가 타국에서 바라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것'에서 생겨난 유산으로 '군인의 공적이라기보단 오히려 외교관 ・상인 ・선교사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즉, 덜레스에게 있어서 '서구의 식민지 개발'엔 전체적으로 '자기청산적' 요소가 있었고, '서구의 식민지주의(western colonialism)'는 '처음부터 해방적 성질을 띠도록, 인간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사고 방식'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서구 각국의 정치적 지배가 평화적으로 퇴각하고, 자치가 이를 대신하도록 추진했다.' 따라서, 전후 5년간 식민지 자치와 독립을 향한 '커다란 움직임'은 '예로부터의 것을 일거에 뒤엎은 것이 아니라, 이를 성취했다'는 논리였다.
- by 오타 오사무(太田修) 著, <두 개의 강화조약에서의 식민지주의와 일한 '청구권'>
덧글
1945년 무렵만 해도, 아직 1870년대 출생자들 1880년대 출생자들이 이제 막 환갑 칠순이고 조선이 망하기 직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중장년층인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사회의 환경은 한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는, 어떤 망상병자들의 바램? 또는 망상과는 판이하걱 달랐지요.
미군에 기생하는 비열한 한남충들은 미국의 마음이 변치 않을 것만 기도할 뿐 미군철수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연구가설명하려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거나 오히려 연구가 비판하는 부분을 옹호하는 데 쓰는데
네. 바로 그 얘깁니다.
예컨데 내가 NL주사파의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이러저러하게 설명해놓은 게 있는데,
누가 그 부분만 싹 인용하며 NL주사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거나 마찬가지.
오사무 교수가 본다면 '어 내가 그렇게 써먹으라고 당시 미국 및 서구열강의 대조선관을 서술한 게 아닌데...' 할겁니다.
나야 어차피 당대 세계의 주류 인식이 어떠했나에 포인트를 두면서 인용한건데, 상대측 주장이라도 판별적으로 수용해 재해석 가할 수 여지야 충분히 있는 것이고, 그게 안 된다면 사료 비판 따위 뭣하러 하나? 하기사, 천조국 빙의질로 호가호위 일제 디스해보는게 조센징 특유의 열패성 자격지심을 중화시킬 수 있는 여건인데 그것마저 쿨하게 퇴짜맞았었다는 현실이 견딜 수 없으니깐 ㅂㄷㅂㄷ하는 심정 이해함.ㅇㅇ
옛다 관심.
하지만 우리(조선사람, 한국사람)는 그런 거 생각 잘 안하죠. 해방된 조선이 승전국이냐 연합국이냐 그런 구분 누가 합니까. 그저 해방, 건국, 좌우투쟁, 토지개혁, 분단국가건설 이런거나 관심있을뿐.
심월이 2ch같은데 오래 머물다 보니 이걸 헷갈린듯요.
애당초 인용 논문의 주제인 배상 청구권이야말로 강화회담 참석 내지 국가 지위 여부에 따라 판가름날 초중대 사안이었는데, 관심을 안 갖는다는 건 순전히 너님의 정신승리 오짐짐이고. 그래서 샌조약에 서명 못한 조선은 대일본제국의 2등 따까리 신분으로 해방을 맞았다는 국제법상 해석이 영원 불변하게 되었다는 게 팩트.ㅇㅇ
그런데 심월님이 현재의 대한민국 및 국제 정세에 대한 견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국민성이야 당연히 비판적이실테고 한국이 어떤 외교를 펼처야 하는 지에 대한 의견을 갖고 계십니까? 왠지 "한국같은 힘없고 바보같은 국가는 지 분수를 알고 지금까지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미국, 일본 형님들에게 절대 충성을 다하며 만에 하나 미국 일본이 중국과 교전을 벌일시 열심히 총알받이 역할을 충실히 행하라" 이러실 것 같기도 합니다. 솔직한 속내를 듣고 싶습니다.
저기 있잖아요...한국전쟁때는 왜 미국 젊은이들이 기꺼이 총알받이 역할을 했답니까?
이태리 - 1945년 반정부 게릴라에 의해 무솔리니가 처형
태국 - 영국과 프랑스의 합의로 원래부터 중립국, 1942년 일본과 동맹관계였지만 1944년 다시 내각이 뒤집힘
한국 - 1910~1945년 8월까지 일본제국. 반도내에서 일본과 세계가 인정할 만큼의 군사적 항쟁을 벌인일도 없고 자의건 타의건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조.
특수국가로 분류된게 신기할 따름이네요.
병합이란 측면에선 독오간 안슐루스를, 식민지배란 측면에선 이탈리아령 아프리카 영토들과 대차 비교해가며 판단을 내린 듯 싶습니다. 신탁통치 준비 단계를 거쳐 독립시킨 건 리비아-소말리랜드와 유사하고, 전쟁 피해로 발생한 손실의 배상에 대해선 2500만$ 상당의 청구권을 인정한 에티오피아 사례를 참조할 수 있겠구요.
다만, 에티오피아는 합법 식민지가 아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침략전쟁에 따른 병탄으로 규정되어 국제연맹의 제재 대상이었던 만큼 조선과 동등한 비교는 곤란한고로, 정식 배상이 아닌 경제 원조 명목으로 보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연합국측의 시각이 한일회담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유추해 볼만하지 않나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