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장례식 사진집




             메이지(明治) 14년(1881) 정변 후 번벌 체제의 중핵 실세로 부상하던 40대 중후반경의 이토 히로부미
             헌법 제정 작업과 제국의회 개설을 사실상 주도해가며 입헌정체 도입에 분주한 전성기의 모습이다.  


              1896년 1월, 오이소(大磯)의 창랑각(滄浪閣) 별장에서 회동한 이토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막말 유신지사의 동지 관계로 출발해 원훈(元勳)에 이르기까지 애증으로 점철된 '라이벌'이었다.


              1898년, 제3차 이토 내각의 출범에 즈음해 대례복 정장 차림으로서 기념 촬영된 총리대신 초상 사진
              청일전쟁 승전과 근대 국민국가 건설의 과업을 달성했으나, 이후 그의 권세는 점차 저하되어 갔다.  


            1901년 12월, 유럽 순방 당시 베를린에서 재독(在獨) 일본인 교민 및 유학생과 회동한 이토 후작 일행   
            독일 체류 기간 카이저는 이토를 접견, '일본의 비스마르크'로 추켜세우며 공적을 치하했다고 한다.


            1909년 11월 1일, 이토의 유해를 실은 군함 아키쓰시마(秋津洲)가 요코스카(橫賀)에 입항중인 광경
            대련(大連)으로부터 당도한 운구를 전달받기 위해 소형 증기선 보트가 함선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해군 사병들의 호위 속에 운구가 부둣가로 상륙해 닻을 내리는 가운데 조포(弔砲)가 발사중인 장면  


             부두로 연결된 잔교(棧橋)를 통과하는 해병 호위대, 이토가(伊藤家)의 유족과 수상 등이 마중나왔다.


             11월 2일 오후 1시 10분경, 요코스카를 출발해 동경의 신바시(新橋) 기차역에 도착한 운구 수송 열차
             황실 칙사(勅使) 호조 우지유키(北條氏恭) 시종을 위시로 황족 및 원로 대신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


             포차(砲車)에 탑재된 유해를 엄호하며 신바시역을 출발하기 시작한 근위사단 보병 연대와 기마대원


            신바시역 광장을 빠져나가는 호송 행렬과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 비보를 듣고 수만의 인파가 몰렸다.


              도바시(土橋) 부근을 통과중인 광경, 타지에서 횡사한 원훈의 귀환길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포차를 호송한 병사들, 국장(國葬)엔 근위사단 및 제1사단 보병 연대와 해군 소총부대가 동원되었다.


            레이난자카(靈南坂)의 관저로 들어서는 운구 행렬, 장례식 당일까지 이곳에 이틀간 임시 안치되었다.
            운구가 안치된 직후 천황은 칙사로 하여금 조의(弔意)를 표하고, 비단 등 물품을 유족에게 하사했다.


            11월 4일 오전 9시경, 히비야로 이동하면서 가스미가세키(霞が關) 부근을 통과중인 장례 제관(祭官)들
            천황 ・황후로부터 기증받은 다마구시()가 운반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많은 조화들을 바쳤다.  
           

            생전 고인에게 서훈되었던 각종 훈장 및 기념장들을 받들어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육해군 파견 장교단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勳位 菊花大綬章)을 위주로 내외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만 20점 이상에 달했다.  


                상여를 호위하면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러일전쟁의 무공 수훈자들과 현역 군(軍) 수뇌부 
                상여의 최좌측 선두가 데라우치(寺內) 육군대신이고, 최우측 선두가 도고(東鄕) 해군 제독이다.


             야마가타(山縣) ・오야마(大山) ・이토(伊東) 육해군 3원수를 선두삼아 뒤따르는 각료 및 고관대작들
             동경 위수총독의 지휘하에 의장병 1개 여단이 투입되어 전반적인 장례 행차 등을 감독하게 했다.   


               상여의 이동 장면을 바라보는 시민들, 새벽부터 몰려든 인파로 시가지 연도의 도처가 혼잡해졌다.
               러일전쟁 개선 관병식에 버금간 소동이라는 후문이 나왔을 정도로 추모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히비야 공원의 장례식장에서 운구의 도착을 기다리는 가쓰라(桂) 수상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磬)
              50년지기 맹우의 죽음에 직면한 이노우에만큼 충격과 비탄에 젖었던 원로도 달리 없었을 것이다.


            육군 대연습 참관차 방일했다가 영국 대표 사절로 참례하게 된 인도군 사령관 키치너(Kitchener) 원수
            막부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구키(九鬼) 남작 ・마쓰카타(松方) 원로가 동석했다.


             의족을 이끌며 식장 경내를 천천히 산보중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4년 후 수상직에 복귀한다.
             만주 벌판에서 자객의 손에 쓰러져 간 것이 차라리 영광스런 최후가 되었다는 묘한 소감을 남겼다.


            장례식장으로 입장중인 훈장 수행대, 양측으로 조문객과 주일(駐日) 외교단 및 사절들이 도열해 있다.


            상여가 식장으로 입장하면서 주변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사이토(齋藤) 해군대신 등이 수행중인 광경
            유해 안치소는 공원 광장의 남측 방면에 마련한 제례소 정중앙에 가설되어 이승과 작별을 고했다.


            훈장 수행대 후미를 따라 유해 안치소로 걸음을 재촉하는 상여, 오전 11시 10분부터 식이 거행되었다.


            가쓰라 수상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중인 고인의 미망인 우메코(梅子) 여사와 상주(喪主) ・근친 유족들
            외유중이던 장남 히로구니(博邦)가 귀국하지 못한 사정상 차남 분키치(文吉)가 대리 상주로 나섰다. 


              상여를 따라온 대신과 문무(文武) 관원이 공원 광장을 가로질러 차례로 안치소를 향해 나가는 모습    


            안치소로 직행한 상여를 바라보며 기립중인 VIP 조문객들, 천황의 대리 칙사와 시종장까지 참례했다.
            하루 전날은 천장절(天長節)로 맑은 날씨였던 반면, 국장일인 이날엔 구름과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외국 무관단의 입장을 맞아 경례를 교환중인 장성들, 선두가 영국 사절 키치너 원수와 수행원들이다.


               안치소로 이송된 유해가 모셔진 상여, 각 방면에서 기증한 다마구시와 화환들이 주위를 장식했다.
               사후 종1품이 추서되었으며, 비(非) 황족 ・공경(公卿) 출신으로선 최초의 국장 예우를 받았다. 


             장례식장 전경, 운구가 안치되고 식전이 본격 거행되기 앞서 조문객들끼리 서로 배회하는 광경이다.


            고인의 유족과 근친이 안치소에서 참배할 당시의 광경, 기타 대신과 문무관 및 사절들이 대기중이다.


             경내가 번잡해진 가운데 칙임관(勅任官) 및 주임관(奏任官)과 기타 관료 일동이 합동 참배중인 광경


            외국 장교단 일행이 속속 참배를 마치고 나올 무렵의 광경, 9개국 특파 사절과 각국 대사가 참례했다.  


             독일 대사관 무관과 러시아 정교회 주교를 포함한 외국인 조문객들이 참배차 안치소로 향하는 장면    


              화족(華族) ・문무 관료 ・군 장성 ・승려 ・외국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야단법석인 대기장 일대의 광경
              식장에 공식 초청된 VIP 조문객들만 5천여명에 육박했으며, 일반 시민의 인파까지 가세되어 왔다.


            공원 입구로 몰려든 일반 참관자들, 이전까지의 어느 국장에서도 이만한 애도가 표출된 적이 없었다. 


            정오를 넘겨 식전이 종료되자, 부축을 받으며 오이무라(大井村) 묘소로 떠나는 우메코 여사와 유족들
            오전부터 잔뜩 흐렸던 기상 상태 속에서 장례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빗방울이 점차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2시 30분경, 오이무라의 다니다리(谷垂) 묘지에 마련된 식장으로 입장한 고인의 전용 운구 마차
            좌측엔 미리 도착했던 우메코와 대리 상주 이토 분키치(伊藤文吉) 남작 등 유가족이 착석하고 있다.


             다니다리 묘지의 비명(碑銘), '추밀원 의장 종1위 대훈위 공작 이토공묘(伊藤公墓)'라고 새겨져 있다.
             오후 4시까지 장지에서 최후의 이별을 고하고 영전제(靈前祭)가 치뤄진 다음, 마침내 안장되었다.




덧글

  • 킹오파 2016/11/16 15:33 # 답글

    야마가타는 왜 참석했는지 이토 죽었을때 파티 열었던 양반으로 알고 있는데...
    글구 보니 병합 찬성파인 야마가타 가쓰라 데라우치 3인방이 전부 이토 장례식에 모였네.
  • 心月 2016/11/16 15:57 #

    1. 명색이 천황의 명령에 따른 국장인데 구색은 갖춰야 하니, 높으신 윗대가리 분들께서 일단 참석하고 봐야죠.

    가쓰라와 데라우치는 각각 현역 수상에 육상이었고, 왕보스 원로 야마가타도 입지상 무조건 참석ㄱㄱ
    아니 정치적으로 피차 얼굴 붉힐 일 있었더라도 어쨌든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찾아가는게 인지상정이죠. 독감 핑계로 YS 장례식에 끝끝내 불참했던 ㄹ혜가 진짜 비상식적 극치의 괴상한 타입이었던거고.

    2. 파티 열었다는 건 금시초문이고, 대신 별장에 있다가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고 함.
    잠시 할 말을 잃더니 '이토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내다. 나는 일개 무사로서 그의 마지막이 얼마나 부러운지를 모르겠다'며 입을 열었다나... 근데 무작정 비꼬았다기엔 오쿠마나 노기 마레스케도 비슷한 뉘앙스를 남긴지라.
  • 킹오파 2016/11/16 16:02 #

    박근혜가 YS 장례식에 참가 안했다고요? 정신 나갔나....
    일본쪽 웹에서 보니까 이토 죽었을때 파티 열었다고 하데요...
    사실인지 알수는 없지만... 파티 연게 사실이라면 차라리 장례식에 참석을 말던가...

    일본에서는 조선 병합 찬성파를 대륙파... 이토 히로부미는 해양 세력파로 보고 있더라고요.
    이토와 무쓰 콤비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제가 이토이고 무쓰이니깐요. 오래 살았어야 할 사람은 이토와 무쓰였어요.
    난 이토를 존경하지만 무쓰 말대로 일본이 조선을 포기한다해도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했어요.
    이토 말대로 남이고 무쓰 말대로 남이니깐요.
  • 心月 2016/11/16 16:03 #

    서울대병원에 안치됐다가 여의도로 운구 옮겨가던 찰나에 얼굴만 잠깐 내비쳤지, 국회 앞에서 치뤄진 국가장 공식 영결식은 황교안이 대신 주재했잖아요... 기본 소양은 커녕 반쯤 맛이 간 여편네가 별 수 있겠냐만은.ㄳ
  • 킹오파 2016/11/16 16:23 # 답글

    개인적인 사견인데 일본 국회 의사당 동상에 이토가 있다는데 중국에 무슨 되도 안 되는 21조 얘기한 오쿠마 대신에 무쓰 무네미쓰의 동상도 좀 둬봐라. 이토와 무쓰 콤비... 이 얼마나 좋노.....

    일본에서는 무쓰 무네미쓰를 탈아의 일원으로 보는데... 탈아고 모고 간에 딱 봐도 답이 나오지 않나? 이거 디메리트가 더 커서 포기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무쓰를 탈아로 볼까요? 사실 남 신경 쓰고 싶지 않는건 당연한 건데...
  • 心月 2016/11/16 16:29 #

    노신영이 왕년에 차관 뜯으러 일본 갔을적에 현지 외무성 회의실내에 무쓰공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었다던데, 지금도 걸려 있을지 모르겠습니다.ㅋ 그리고 무쓰는 외교가로선 몰라도 정치가로선 민권파 배신때리고 번벌에 빌붙은 한마디로 '출세 지향주의자'란 인식이 강한지라 국회에 흉상이나 동상 따위 세워질 일은 없을 듯요.

    뭐 그래도 우리의 이토공은 서민들이 가장 애용한 1천엔권 주인공으로 등판한 전적도 있지 않습니까ㄲㄲ
  • 킹오파 2016/11/16 16:48 # 답글

    차관 뜯으러...라.... 그러고 보니 한국 정부는 일본 상대로 일본이 한국 돈 받고 달러 주고 한국은 엔화 받고 달러 주고 이런 스와프를 원한다고 하더군요. 달러를 원한다면 미국 가지 왜 일본 가냐고.... 이게 말이나 되나? 엔화는 이미 달러와 무제한 스왑인데 뭐하러 번거롭게 한국을 이용해 미국과 직빵으로 하는게 더 빠른데.... 한국돈 외국 가면 찐따라 써먹지도 못하는데 일본애들이 한국 돈 받아서 무엇에 쓰냐고... 왜 리스크를 지면서까지 한국을 도와야 해... 남인데...

    한마디로 한국은 일본에게 "인도처럼 특별대우 해달라" 고 주장하네요.... 인도는 담보없이 스왑해준걸로 아는데 한국이 인도처럼 미국도 무시못할 강대국이야? 아님 인도처럼 가난해? 아님 떠오르는 미래의 황금시장이야? 그것도 아니니 담보를 제시해야지... 뭐하자는 짓인지...

    더군다나 가관인건 스왑은 위기 상황에 발동되는 건데 그걸 무역에다 쓰겠다고 하더군요. (스왑 자금을 왜 무역에다 써... 그건 스왑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일본에게 달러 받아서 무역으로 쓰겠다? 도대체 일본이 뭘 믿고 담보도 없이 저리로 귀한 달러를 빌려줘야 하는데? 남에게 특별 대우 바라지 말고 그냥 담보 제시해서 정상적인 관계로 가면 안되나? 담보만 제시하면 저리로 알아서 빌려줄텐데 왜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지 원....
  • ㄹㅍㄹ 2016/11/16 17:08 # 삭제 답글

    저기 저 어그로가 도배하는거같은데 차단좀 부탁요 ㅇㅇ
  • 心月 2016/11/17 00:41 #

    도배 삭제하고, 차단시켰음.
  • 진보만세 2016/11/16 23:09 # 답글

    이토가 다카스기 신사쿠의 '공산사 거병' 당시 머뭇거리던 야마가타의 기병대를 제치고 일착으로 가담했던 이유로, 조슈번 내 친막부파 자객들에게 '맹우' 이노우에 가오루가 난자당한 분노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요..

    여하튼 막말의 역사를 써내려간 마츠카타, 요시노부에 키치너까지 도열한 사진 등 희귀한 자료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주셔서 진정으로 감사 드립니다..
  • 心月 2016/11/17 00:40 #

    물론 이토가 새삼 그 시절 비화로 야마가타에게 모욕준 일은 없었고, 누구나 생사를 오갔던 격동기였으니 만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치더라도, 유신 이래 특히 헌정 실시가 본궤도에 오른 후부터 국정 노선을 둘러싸고 걸핏하면 분출된 양자간 대립과 오해가 관계를 서서히 갉아먹어 갔다는데엔 이견이 없을 겁니다.

    특히 야마가타계 보수파 관료가 주도했던 총선 개입시 정부의 강경책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몸소 정당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토에 대해 시나가와 야지로가 겁박주고, 이토 역시 사석에서 야마가타와 시나가와를 싸잡아 흉본 것이야말로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가 유력시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말이죠.

    사실 이토 입장에서도 충분히 분노할 만한 사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메이지 헌법과 의회제도의 산파역은 자기 자신이라는 긍지감에 들떠 있었는데, 야마가타가 헌정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없이 정파적 계산에만 몰두하며 그 가치를 함부로 훼손시키려는 걸 보고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는 건 필연적 결과였을 수밖에요.

    ps. 상찬의 말씀에 제가 다 쑥스러워지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 담배피는남자 2016/11/17 10:43 # 답글

    대한제국에서도 조문사절을 파견했던걸로 압니다
  • 心月 2016/11/17 11:54 #

    궁내부 대신 민병석과 농상공부 대신 조중응이가 특파 사절로 건너갔다죠. 장례 기간 동안 한국 조정 차원에서 가무음곡 금지시키고, 장충단 나가 추모회까지 벌여가며 고인에게 문충공 시호 추서한 건 서비스ㄳ

    보어전쟁과 1차대전의 그 키치너가 참례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레알 깜놀했습니다요.
  • 명탐정 호성 2016/11/24 23:12 # 답글

    안중근이 이토 암살했던 수사,재판 기록보면 좀 깹니다.
  • ㅇㅇ 2017/08/02 23:23 # 삭제 답글

    저 키치너가 1차대전 영국 육군원수 그 키치너인가요?
    북해 배타고 가다 죽은?
  • 心月 2017/08/04 23:29 #

    네엡 모병 포스터에서 영국의 청년들을 원한다며 포즈 취했던 그 원수님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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