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선도 대만을 배워서 개과천선 좀 해봅시다? 세계사








대만(臺灣) 시찰단의 초기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인 관료들을 주축으로 이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가운데 조선인도 있었다. 일행엔 당시 '한성은행 전무 취체역(取締役=理事)이었던 한상룡(韓相龍)도 동석했다.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 평가받는 한상룡은 일인(日人) 관료들처럼 대만 박람회 참가를 계기로 대만을 시찰했고, 그의 체험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되었다. 시찰 기행문에는 '대만의 사업'에 대한 기사가 가장 많은데, 이는 '조선 경제인에 의한 대만 체험'을 통해 대만의 식민지 산업화를 통한 경제 성장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와 연결된다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대만 시찰은 다른 시찰과 마찬가지로 빡빡한 일정으로 개인적인 기대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굉장한 제한이 있었는데, 스스로도 시찰이 본인의 예상과는 다소 어긋나 있었다고 밝혔다.

시찰기 가운데 그의 생각이 비교적 잘 드러난 <대만 시찰의 감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총독부 관료들에게는 언급이 적었던 부분, 즉 대만에 대비한 조선의 후진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조선의 대만화(臺灣化)'를 다소 일방적으로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민족성'을 부정, 비판하면서 조선의 미래적 방향은 '조선의 특수성'을 모두 내버리고 대만을 시급히 배워 일제에 더욱 종속되고, 동화되는 길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의 대만 발전상에 대한 언급을 보자.



"산업의 발달은 이러한 부력(富力)이 작았을지라도 그 원인은 천여(天與)의 산물이 무한하고, 또한 수확이 용이함에 있다. 그러한데 행정 당무자가 열의로 산물의 개발을 장려하고, 명물(名物)을 이루어 실속있게 힘쓰는 데에 의지해 이용후생에 노력한 결과에 다르지 않다. 그러나 대만 주민은 우리 조선인처럼 태만하고, 퇴영적임과는 달라 일단이 근검역행의 미풍에 따르고, 인내력과 저축심의 강함도 문득 화식력(貨植力)을 증진한 최대 원인이라 하겠다."



기업가 출신 한상룡은 자연스럽게 대만 산업의 발달에 주목하고 있다. 대만의 풍부한 산물이 부력으로 연결된 것은 일본의 노력과 더불어 대만인들의 협력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을 '태만' ・'퇴영'으로 대만인을 '근검' ・'인내'로 대비해 후진적인 조선의 민족성을 부각시켰는데, 이는 조선이 노력해야 할 것은 당국의 식민정책에 대한 순응과 함께 일본의 국민성[민족성]을 체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동화'의 맥락과 연결된다 하겠다. 그는 특히 대만인의 저축과 화식력을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는데, 이는 금융권을 활성화시켜 조선의 경제를 일본 자본에 더욱 예속시키려는 총독부 의중과 당시 한성은행 소속이었던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려가 결합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생번(生蕃) ・번인(蕃人) 등 원주민을 식민지 대만의 국민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은 좁고도 작은 하나의 고도(孤島)이다. 그러나 인구 305만을 포용하여-물론 번계(蕃界)는 제외한-'라며 이러한 인종 차별주의적 언급은 대만에서의 일제 식민 정책상의 동화는 사실상 한족 중심의 '본도인(本島人)'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고,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 의식과 정치적 제한이 비교적 엄중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의 대만 통치는 한족과 원주민을 따로 구분하는 차별 구조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고, 일제의 이념을 깊이 흡수한 한상룡에게도 번족은 한족과 엄격히 구분되는 야만, 그 자체로 제국의 국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인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은 자신으로부터 조선을 철저히 '타자화'하는 동시에 자신을 철저히 객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상룡이 인식하고 있었던 자기 정체성의 일면과 자신의 지향하는 민족성의 방향을 보여준다 하겠다.



"대만에서는 도상(道上)에서 난취(爛醉)하거나 혹은 입으로 시끄럽게 떠들어댄 행위 등을 보는 것이 적고, 질서의 정연함은 한편으로 놀라움을 만끽하였으니, 조선처럼 노변에서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거나 혹은 욕하고 꾸짖으며 울부짖는 모습을 이따금 혼자서 보는 것과 같은 건 품성의 수양상 급작스럽고, 소홀함에 따라 불가한 동시에 풍기 단속상에도 한 번쯤 생각할 바를 요구할 일이다. 대개 이렇게 되는 것은 동상(同上) 발전의 국민성 함양에 영향가는 바가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을 대단히 우려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대만의] 사민(士民) 복장은 남녀가 함께 대부분 흑색이고, 남자는 많이 단발했으니 선인(鮮人)처럼 한 가지 옷[=白衣]만 착용하거나 세탁에 궁색함과 다르면 자못 경제적이며, 단발은 결발(結髮)과 다르면 동작이 경쾌해져 작채상(作菜上)의 편리도 크게 많아질 것이다."



한상룡은 조선 거리의 불결성을 조선인의 태만성과 연결하면서 당국이 서둘러 '국민성 함양'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고려할 것을 주장했고, 나아가 조선인의 백의 풍습이 비경제적이며, 상투나 쪽진머리 역시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이러한 부정의 논리는 조선적인 것과 근대적인[일본적인] 것이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근대적 계몽의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어서 원주민 학생들이 창가(唱歌)를 부르는 광경을 통해 동화 정책의 효과를 찬양하면서 동화 정책의 핵심 기구였던 학교 이용이 저조한 조선을 질타했다. 조선의 보통학교(普通學校) 취학률이 대만의 공학교(公學校)에 비해 낮은 것은 아직도 일제가 내세운 정책에 둔감하고, 나아가 소위 문명개화(文明開化)에 대한 발달에 무감각한 조선인의 탓으로 당국이 이를 더욱 철저히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경찰 행정을 돕고, 젋은 사람을 조직해 항일 무장 투쟁을 진압하는 한편 대만인의 친일 포섭 및 유화정책으로 사용한 식민지하 집단 감시체제의 상징인 대만에서의 '보갑제도(保甲制度)'를 서둘러 도입해 총독부 경비와 경찰의 업무 부담을 덜고 '지방 경찰 보조와 풍속의 개량 등에 선용(善用)'할 것을 주장했다. 덧붙여 '엄격한 규율 감시하에 취업을 강제'하는 등의 조치로 '무뢰한 단속상에 적절'히 이용할 것도 주장했다. 한상룡의 대만 시찰이 권업 공진회 참가라는 공적인 측면에 강했던 것에 비해 전북 참여관이었던 박영철(朴永喆)의 시찰은 비교적 일반 시찰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찰기는 한상룡의 경우와 달리 일종의 기행문에 가까워 묘사나 설명이 구체적이고 상세해 여정의 궤적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한 면모도 상당히 감소된 측면이 보인다.



"대저 일반 대만인은 260년전에 광동(廣東) ・복건(福建)으로 이래(移來)한 민족이고, 번인은 재래한 만종(蠻種)이라 성질이 참독(慘毒)해 동족외의 사람은 마주하는 즉시 학살하고, 수급을 헌벽(軒壁)에 줄지어 놓아 수급으로 다획한 자가 스스로 호걸이라 가장하는 악성있는 족류(族類)인고로 당국에서 백반무순(百般撫循)해 귀화자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출입을 경계해 흉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니, 귀화자가 많아져 번계(蕃界)가 점차 축소되었다."



박영철은 대만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노출하며 번인은 동화된 대만인과 구별되는 폭악무도한 반(反) 문명적 존재로 여기며 이들을 대립관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원주민은 문명의 세례를 입은 대만인과 경계가 분명한 자로 일제의 국민이 될 자격이 없고, 그럴 수도 없는 비(非) 문명인이었던 것이다. 이는 국민의 자격 여부는 그저 단순히 그 지역에 거주하는 이가 아니라 '동화' 여부에 달렸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하겠다. 그럼에도, 일제의 거듭된 노력에 힘입어 이러한 대만 원주민조차 점차 귀화하는 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서술하면서 동화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일제 식민 당국 자체도 대만 원주민에 대한 편견이 가득해 이들은 어디까지나 동물적 폭력성을 가진 야만족에 불과하며, 식민통치와 교화(敎化)의 성과마저 부정하게끔 만드는 존재인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던 터였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총독부가 이들을 잘 교화해 경찰견의 대리품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여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원주민의 포악성과 비 문명성은 역으로 총독부의 동화정책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박영철 역시 고산(高山)에 거주한 대만 원주민을 야만과 비 문명의 상징으로 보면서도, 총독부의 노력으로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번족마저 문명화로 진입하고 있다며 일제의 동화정책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한편, 박영철도 대만의 근대화는 '당국의 헌신에 기초한 문명의 시혜'라는 관점을 보여주며, 이는 제국 일본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인민'을 위한 일이었음을 드러냈다. 그는 일제의 통치는 일본을 위한 것이 아닌 대만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 하면서 이들의 통치는 가히 특수한 성격이 아닌 보편적 가치와 연결되는 사안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비록 당국의 시설이 아주 마땅할지라도, 개개인이 근면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전한 생활을 얻기 어려우니 더욱이 조선은 천혜(天惠)가 부족한 지방이라 별반이 교육과 산업에 장려하며 근검과 저축에 주의해 실력을 양성할지니, 구설(口舌)로만 고담준론(高談峻論)하고, 학식이 없어서 뱃속이 텅 비었으며, 실력이 없어서 맨손과 맨주먹만으로 안전한 생활을 희망한다면 바라건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지라 어찌 개탄하지 아니하겠는가?"



한상룡과 마찬가지로 강제 취업제도가 강조되고 있다. 이 제도를 조선에 도입하여 모든 조선 청년이 '근면 성실'히 일하게 해야 한다는 한상룡의 결론처럼 '근면한 국민 만들기'에 관심을 경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대만의 발전이 당국의 헌신과 함께 대만인의 협력에 기반을 둔 것임을 드러내며, 조선인의 일제 협력이 장래 조선의 발전과 미래를 결정하는 밀접한 원인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대만과의 비교를 통해 만약 조선에 이런 노력이 없다면 조선의 미래는 원주민을 안고 있는 대만보다 더 후진적일 것이라는 경고를 우회적으로 던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농경 사회의 특성으로 대만처럼 당장 자본화될 자원들이 비교적 적었던 조선은 대만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일제의 통치에 협력하면서 '교육과 산업의 장려, 근검과 저축' 등에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준비와 노력이 없는 논의들은 '연목구어'와도 같은 우매한 행동이라 강조하며 시찰기를 마쳤다. 결론적으로 '대만을 본받아 공리공담이 아닌 실질적 근대화 및 일본화'를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두 조선인의 시찰기는 공통적으로 현재 대만의 발전은 당국의 헌신과 대만인들의 협력 ・순응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대만이란 검증된 식민지를 본받아 더욱 분발해 조선적인 것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더욱 철저히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을 연결시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결핍과 부재'는 식민통치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의 부재와 동시에 조선의 민족성의 상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만과 같은 모범적 식민지가 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결국 '조선적인 외형과 내면'이라는 것이 이들 주장의 기저라 할 수 있다.

- by 한길로 著 <일제강점기 조선에 비친 식민지 대만의 허실, 그리고 조선>에서 발췌 




               시정(施政) 초기의 대만총독부 청사 정문, 청조(淸朝)의 포정사 아문을 그대로 접수해 입주하였다.
               청일전쟁 이래 1919년까지 7명의 역대 총독이 여기서 집무를 관장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총독부 회의실, 관청 조직이 비대화되고 업무가 증가하면서 1909년부터 신(新)청사 건립에 착수했다. 


                 옛 대북성(臺北城) 동문(東門) 근방에 소재한 총독관저 전경, 22만엔의 경비로 1901년 준공했다.            
                 이후 수 차례의 증축을 거쳤으며, 국민당 치하에선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1908년 7월 촬영 
         

            대만은행(臺灣銀行) 본점, 1899년 설립된 관영 은행으로 식민지 경제 시스템의 중추이자 심장부였다.
            제당업 성장의 조류에 편승해 사업을 전개했으나, 쇼와(昭和) 금융 공황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북시 남쪽 교외에 소재한 전매국(專賣局)과 제약소(製藥所), 아편 ・장뇌 의 독점 판매를 주관했다.  
            전매 수익은 총독부 재정 자립과 흑자의 기반으로 당국마저 현혹시켰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대북 공원에 세워진 4대 총독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郞) 장군의 대리석상, 2차대전 후 철거당했다.  


             총독부 직속 관립 병원으로 1898년 개원한 대북의원(臺北醫院) 입구 전경, 9동의 병실로 구성되었다.
             식민시대 초기 풍토병의 창궐에 맞서 추진된 위생 및 보건 사업은 문명화의 상징으로 선전되었다.   


               대북 기차역, 연와(煉瓦) 석조의 2층짜리 건축물로 1901년 기존 정거장을 이전시켜 개설한 것이다.
               종관철도(縱貫鐵道)의 기착지이며, 역사(驛舍) 자체는 일제 말기에 콘크리트로 재차 신축되었다.


              대북시 북쪽 대직산(大直山)과 원산(圓山) 사이를 흐르는 기륭천(基隆川)에 가설된 명치교(明治橋)
              1901년 대직산 중턱에 대만신사(臺灣神社)가 준공됨과 동시에 교통망 정비의 일환으로 개통했다. 


            기륭항(基隆港) 잔교(棧橋) 광경, 일본 내지(內地)와 연결된 항로의 관문으로 연락선들이 정박중이다.
            1906년 이후 7개년 프로젝트로 축항 공사가 전개되면서 시설을 정비하고, 종관철도와 접속시켰다. 




덧글

  • 명탐정 호성 2016/11/24 23:10 # 답글

    시찰하면 그 며칠전부터 엄청나게 아랫사람들이 고생하고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