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속방(屬邦)의 멸망을 바라본 청나라 황실의 심경 세계사








같은 해[1910] 9월초 청 정부의 신임 주일공사 왕대섭(汪大燮)도 일본의 한국 병합이 중국 만주 지역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촉구하는 상주문을 제출하였다. 당시 청국 외무부에서도 만주 지역의 안전 문제, 특히 만주 거주 한국인 문제를 걱정하면서 길림순무(吉林巡撫) 진소상(陳昭常)에게 타전하여 장춘(長春) ・혼춘(渾春) ・연길(延吉) 각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한국 병합 반대 움직임에 각별히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고, 심지어 연길 거주 한국인들의 병합 반대 행동을 엄중 단속해 줄 것에 관한 일본 공사 이주인(伊集院)의 요청마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병합이 실행되면서 식민 통치를 거부하고, 중국 귀화를 신청한 한국인이 속속 나타나자, 한국인의 중국 국적 가입 문제가 자칫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으로 비화될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청국 민정부(民政府)에선 각 지방 정부에서 특별히 심사를 강화해 조금이라도 청나라 국적법의 관련 규정에 부합되지 않을 경우, 절대로 허락해주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외무부를 비롯한 청국 관련 부처의 위와 같은 인식과 대응이 다분히 즉시적이고, 사무적인 구체적 차원이라면 청나라 최고 지배층인 만주 황실의 인식과 대응은 훨씬 더 거시적이고, 포괄적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청일전쟁 및 북청사변으로 상실된 민심과 중앙 집권력을 회복하고자 최후의 노력을 경주하던 청조는 바깥으로 혁명 세력의 반청(反淸) 운동과 입헌 세력의 헌법 제정 요구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양무 자강운동 및 '신정(新政)'을 통해 급성장한 한족(漢族) 출신 관료에 의해 장악된 지방 권력의 분권화 동향에 흔들리면서 만주족 중심의 정치 ・사회 지배체제 및 국정 장악력 모두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특히 청조 황실의 만주 귀족 집단에 있어서 가까운 이웃나라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한국 황실이 몰락한 사실은 결코 강 건너 불 보듯이 남의 나라 일처럼 보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청조 및 황실의 흥망과 존속에 대한 걱정으로 곧바로 이어졌는데, 그 내용은 당시의 중국 언론에서도 자주 기사화될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마침 선통황제(宣統皇帝) 부의(溥儀)가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생부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이 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을 맡고 있었지만, 황실의 최고 권력자는 황태후의 신분으로 '수렴청정'하고 있는 융유태후(隆裕太后) 나랍씨(那拉氏)였다. 한국 병합이 발표된 직후, 융유태후는 자금성(紫禁城)의 영수궁(寧壽宮)에서 특별히 섭정왕을 불러 한국 병합의 경위 및 한국 망국(亡國) 후의 상황을 자세히 문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삼한(三韓)은 정말로 망하였구나.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 없지만, 외국인들이 우리 변경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신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해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



당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청나라 황실의 최고 권력자로서 대한제국 및 한국 황실의 몰락에 관한 보고를 직접 받은 융유태후의 마음이 각별하였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으며, 또한 일본의 한국 병합과 관련하여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 없다[我國自顧不遑, 斷難幹預]'는 주장은 앞서 인용했던 청국 외무부의 공식 입장과도 일맥상통했다. 실제로 한국 병합에 관한 일본측으로부터의 공식 통보를 받은 직후, 청국 조정은 8월 28일과 29일에 연속 군기처(軍機處) 및 각 부(部) 대신들의 공동 회의를 개최하여 관련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특히 한일합방 및 러일협약 체결에 따른 대책 마련에 고심했고, 필요할 경우 어느 열강 국가와 조약을 체결해 대항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여기서 조약을 체결하기로 한 '열강 국가'가 도대체 어느 나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만큼 청국 최고 통치집단 내부에서 한국 병합의 외교적 파장, 특히 자국의 국토 안전을 크게 걱정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 무렵 중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청국 정부는 일찍이 1897년 대한제국의 건립 때부터 이미 한국이 조만간 일본에 의해 보호되고, 나아가 병탄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병합 소식에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처음부터 반대해 오지 못했던 까닭으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왈가왈부할 수 없다고 전하였다. 합방 조약 발표 직후, 황실의 어느 귀족이 한국의 망국과 관련하여 섭정왕인 순친왕 재풍에게 매우 침통한 언어로 진언하자, 섭정왕은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위 아래 없이 한 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섭정왕 자신도 병합 발표 후 조정 대신들에게 향후 외교 문제의 처리에 각별히 신중하고, 내정 사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정돈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민심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는데, 바로 한국의 망국 교훈을 나름대로 섭취하려는 자세였다. 또한, 섭정왕은 일본의 한국 병합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면이 적지 않다면서 조정 대신들에게 언로(言路)를 크게 열 수 있는 방법을 적극 강구하여 반드시 위 아래가 한 마음이 되어 국가의 근본을 튼튼히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했으며, 심지어 보수적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개원을 허용하기로 한 방침을 굳혔다고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청국 정부가 한국 병합 발표 1개월 후인 10월 3일에 헌법 제정을 위한 자문기구인 자정원(資政院)을 개설하고, 11월 4일엔 9년간의 제헌 예비 기간을 5년으로 단축시키기로 하는 등 입헌 군주제 실행 과정을 다그치기 시작한 것은 내부의 여러 원인 외에 한일합방의 충격 역시 일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by 권혁수 著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에 관한 청(淸) 정부의 인식과 대응>에서 발췌




             서울 한강 남안의 송파진(松坡津) 부근에 소재한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일명 삼전도비
             병자년(丙子年) 삼한 평정을 기념해 세워진 것으로 조청(朝淸) 군신관계의 상징적 조형물이었다.




덧글

  • 2016/12/12 18:2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12/13 03:3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12/15 13:3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12/12 19:1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12/13 03:2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Minowski 2016/12/13 09:20 # 삭제 답글

    청일전쟁-영일동맹-러일전쟁-그레이트게임 종결-대한제국병합 으로 이어지는 큰 줄기를 보면 아베의 작년에 과거사 반성기점이 만주사변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일동맹으로 동북아의 패권국이던 청을 몰락시키고, 영국에게 러시아를 견제할 동북아의 파트너로 인정받고 러일전쟁을 통해 팽팽하던 그레이트 게임이 종결되는 계기가 되고.....이로서 일본은 제국의 일원으로 전세계의 땅덩어리를 나눠먹을 권리를 인정받게 되고......

    거스름돈 입장이었던 한반도에게는 실로 통탄할 일 이겠지만 (그렇다고 진실로 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보지도 않지만......)

  • 킹오파 2016/12/13 11:11 #

    내가 아베라면 조선 병합을 반성할텐데... 남인데 남을 왜 병합함... 것두 무가치인데... 운지잖여.
    내가 이토고 내가 무쓰인데 이게 뭐하는 짓이여. 일본인들은 조선 병합 후회 안하나요?
  • 心月 2016/12/15 01:27 #

    Minowski//

    동아시아 및 태평양 분할권을 인정받은 댓가로 유럽 열강과의 합종책이라 할 수 있는 소위 협조 체제를 견지한 조건하에서 팽창을 이룩해왔던 것이니깐요. 1차대전 이후 그 협조 체제가 약화되고, 신흥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중국 문호 개방에 맞서 최소한의 국제법 준수 절차조차 생략한 채 대륙에서의 권익을 사정없이 추구해 나가기 시작한 만주사변부터 일이 꼬였다고 해석하는 시각인거죠. 저 역시 일본측 논리의 정당성 시시비비를 떠나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적 흐름 자체가 미국의 중국 개방을 빙자한 시장 침투와 거기에 맞선 일본의 독점적 만몽 경영으로부터 도화선 발단이 되었다는 주장 만큼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킹오파//

    그냥 만주철도-내몽골 경영의 후방 샌드백 기지로 활용할 겸 안보 논리에 따라 병합 저지르고 본 거.
    후회할지 안 할지는 가쓰라나 데라우치 묘소로 찾아가 군바리가 왜 하라는 군역은 안지고, 정치판에 끼어들어 재정 부담은 안중에도 두지 않으며 병합이란 실책 저질렀는지 따져보삼. 걔들은 이렇게 변명하겠지.

    "조선과 만주 루트 연결한 블록 경제권 창설하면 손실 벌충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ㄳ
  • 2016/12/13 22:0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12/15 01:0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