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對中) 문호개방의 환상과 좌절 세계사








미서전쟁으로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국의 지배력을 수립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거점을 획득한 후 미국은 강대국의 역할을 맡기 시작해야만 했다. 이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세력 균형의 활동 분야를 낯설은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시키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어느 국가도 그곳의 규칙을 확실히 알지 못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그곳에서 그들이 다른 곳에서 누리지 못하는 어떠한 자연적 어드밴티지를 누렸다. 무너져가는 중국의 만주족 왕조가 자국이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통제권을 위한 각축 대상임을 알았을 때, 미국은 팽창 일로인 자국의 산업을 위해서 중국 시장에서의 공정한 몫을 분배받고, 확보하고자 하였다. 중국 시장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거의 100년 동안 헛된 꿈을 가졌고, 그 당시에 아마도 중국 대외무역 비중의 불과 3%에 해당되었던 '제한 없는 시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국가들에게 동등한 상업적 기회를 보장할 것을 의미하는 미국의 '문호개방정책(Open Door)'을 야기시켰다. 중국 대외무역의 상당 부분의 통제자이며, 독일 ・러시아 ・일본 그리고 프랑스에 의해서 종속적 상태로 되어가고 있는 중국의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를 반대해 온 영국은 존 헤이(John Hay)가 제기함에 따라 적어도 처음엔 문호개방 사상을 지지했다. 국무장관 헤이는 싹트고 있는 앵글로-아메리칸의 우정을 성숙시키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고립주의의 잔재와 투쟁을 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강한 해군과 제국주의적 모험에 부속되는 권력과 위신에 대한 좋은 감정을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물며 세계의 강대국으로 따라오게 될 자신들의 새로운 지위에 수반되는 전체 범위의 책임감을 도맡는 것은 고사하고, 고립주의를 단념하고 싶어하진 않았다.

헤이는 상업적 동등성에 대한 약속 뿐만 아니라, 이익권마저 폐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영국조차도 자국의 방책을 강구하면서 다른 국가들과의 유사한 승인을 조건으로 하는 보장만을 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답변으로 응하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죽음과 북경 주재 외국 공사관에 대한 공격을 수반한 서구에 '의화단 사건(Boxer Rebellion)'으로 알려진 일부의 국수주의적 광란이 중국에서 발생한 후 미국은 2만명으로 구성된 국제적 원정 구조군에 2500명을 지원하였다. 한편, 헤이는 동등한 무역 원칙을 반복하는 통첩을 열강들에게 유포시키고, 그것이 중국의 영토적 ・행정적 보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의 정책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강력히 시행하기 위한 그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취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극동에서 활동중인 세력들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인들은 그러한 권력 투쟁의 결과를 스스로의 미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먼로 독트린의 경우처럼 문호개방 원칙을 거의 확고하게 믿었던 그들은 단순히 새로운 대외 공약과 모순되는 과거의 도덕주의덕 이상을 재천명함으로써 자국의 외교정책 전통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외교적 수단으로 문호개방을 계속 지지했지만, 미국은 무력 사용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아시아 정치에 활동적인 관여를 약속하진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자신의 도덕주의덕 선언이 암시하는 것보다 세력 균형이 더 났다고 이해한 루스벨트는 러시아가 극동에서 일본 세력의 성장에 대한 평형추 지위를 보유하는 결과를 선호하였다. 그는 조정자를 자임하면서 두 교전국을 뉴햄프셔의 포츠머스로 초청해 강화조약을 체결시켰다.

비록 강화조약의 조건이 전반적으로 일본측에 유리했지만, 일본 국민들은 포츠머스 조약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대통령이 극동에서의 가공할 만한 새로운 국가로서 일본의 출현에 대한 현실주의적이고 우호적인 조정을 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일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양국은 필리핀 ・조선 ・만주 ・태평양에서 상호간의 영토 보유, 그리고 중국의 독립과 보전, 그 제국내의 문호개방 원칙에 대해서 다소 깨지기 쉬운 협정을 체결했으나, 일본은 캘리포니아의 자국민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로 감정이 심히 상했다. 이민 문제와 극동에서의 권익을 맞교환하는 내용의 '신사협정'을 체결한 루스벨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일간의 상호 불신의 먹구름은 전적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직접적인 계승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그의 감정을 결여하고 있었다.

윌리엄 태프트와 국무장관 필랜더 녹스(Philander Knox)는 법인 변호사들로 그들은 외교에 대해서 주로 법률주의적 접근 방식과 재정적 수단에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해외에서 미국의 시장과 투자를 증진시키고, 동시에 외교 정책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선 정부와 기업이 함께 일하고 상호 이익을 위해 협력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달러로 총탄을 대신하는 것[태프트 자신의 표현]'은 '달러 외교(Dollar Diplomacy)'라 알려질 정책의 본질이었다. 태프트와 녹스는 만주 철도의 재정과 관리를 위해 다소 비현실적인 제안을 내놓았으나, 오직 독일의 지지만 받았을 뿐이었다. 명백히 유럽과 아시아 간의 점진적 관계는 고사하고, 유럽이나 극동에서의 세력 균형도 이해하지 못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적대 관계를 청산시키고 보조를 맞추어 미국의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갱신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미 1907년 페르시아에 관한 협정을 맺은 상황이었고, 러시아와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맞선 기존의 동맹을 강화시켰으며, 프랑스 역시 극동에서의 세력권 분할에 관한 별도의 협상을 일본과 타결지었다. 영국과 프랑스 어느 국가도 태프트와 녹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극동의 자신들의 '파트너'를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태프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이전까지 많은 중국인들은 미국을 열강들 가운데 자신들의 나라에 이해관계가 없는 유일한 우방국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 스스로 국제적 사업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마치 약탈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의 정책은 그 상황을 악화시켜 외국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중국의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이내 청조를 무너뜨린 1911년의 신해혁명을 초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동경의 제국 호텔에서 청나라 시찰단장 재도(載濤)와 회동한 오야마(大山) 원수 및 고토(後藤) 체신상   
            만몽(滿蒙)에서의 권익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문호 폐쇄는 본격 대륙 병탄의 서막이자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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