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신(現人神)의 초상, 어진영이 탄생하게 된 과정 세계사








사진 촬영의 결정적인 새로움은 천황을 살다가 죽어가는 인간의 일생을 보내는 존재로 보게끔 만든다는 것이었다. 니시키에(錦絵)의 경우엔 모노가타리(物語)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천황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인 천황의 명백한 일면이다. 때문에 사진은 자연스럽게 찍힌 시기를 보여주게 된다. 천황은 시간에 따라 성숙되고, 늙어가며 변화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메이지 천황의 초상 사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미 언급한 1872년 사진[소쿠타이(束帯) 등을 착용한 전통 의상] ・1873년 사진[군복 양장]과 흔히 '메이지 천황'이라고 하면 금방 그 이미지가 떠올려지는 1888년의 초상 등 세 종류이다. <메이지 천황기(明治天皇紀)>엔 말을 탄 늠름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있다고 적혀있으므로, 이외에도 촬영했을 사진이 더 있다는 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승마 사진은 요코야마 마츠사부로(横山松三郎)에 의해 촬영되어 빈(Wien)의 만국 박람회에 출품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자들도 있다. 이외에도 일반인에게 유출되지 않았던 것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만년의 옆 얼굴을 찍은 사진이 유포되고 있지만, 이것은 [1911년] 군사 대연습 당시 임시 휴게소에서 참모본부 사진부원이 암묵적인 허가를 얻어서 천황 모르게 촬영한 것으로 본래는 고개를 숙인 모습을 트리밍(Trimming)하여 방향만 바꾼 것이다. 어느 것이든 '초상 사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1872년 ・1873년 ・1888년의 세 종류만을 고려해도 충분할 것이다. 메이지 초기엔 어느 누구든지 빈번하게 사진찍는 관습이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한 국가의 상징인 천황의 사진이 이렇듯 오랫동안 촬영되지 않았던 것은 기묘하게 생각된다.

그동안 어렸던 천황도 나이가 들고, '군덕(君德)을 함양'하여 제왕으로서의 공적인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용모 또한 변했다. 실재하는 천황과 사진으로서의 천황이 너무 달라서는 곤란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실제로 곤란한 일도 발생했다. 새로운 사진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서둘렀던 인물은 천황이 아니라 궁내대신 히지카타 히사모토(土方久元)였다. <메이지 천황기>는 1888년 조(條)에서 '천황은 촬영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진영으로 존재하는 것은 [1873년 촬영된] 구제(舊制) 프랑스식 군복을 비롯하여 모두 10여년 전에 촬영한 것이어서 외국 황족이나 귀빈에게 증여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하는 자가 있을 때마다 대신(大臣, 히지카타를 가리킴) 등은 그 처리 때문에 곤란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메이지 천황이 왜 그토록 사진 찍기를 싫어했는지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내용에서 명확해지는 중요한 사실은 1873년 이후 천황이 본격적인 초상 사진을 결코 촬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73년엔 서구와 대등한 양장을 입은 사진 쪽이 바람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촬영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시 사진을 촬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888년까지 복식 제도는 종종 개정되었지만, 1872년부터 73년에 거쳐 천황의 외양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렇듯 긴급한 필요가 없어서 별로 진전되지 않다가 어느새 십수년이 지나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궁내성에 소속된 [궁중에서 황족의 촬영을 내락받았던] 우치다 쿠이치(田九一)가 그의 사진관이 한참 번창하던 1875년에 불과 31세로 요절한 것도 사진 촬영의 기회를 놓쳐버린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후엔 스즈키 신이치(鈴木真一)와 마루키 리요(丸木利陽)가 궁내성 소속 사진가로 궁중을 출입했다.




             1873년 10월 8일, 전속 기사 우치다 쿠이치가 직접 촬영한 21세의 청년 군주 메이지 천황의 초상 사진
             복장 개혁과 단발(斷髮)을 행한 직후로 서구화된 천황의 자태는 근대적인 시각 효과를 창출하였다.  




외교적으로 사진을 교환할 경우에도 예를 벗어나기 때문에 측근으로선 더 이상 낡은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해에 드디어 새로운 사진이 완성됐다. 이것은 장년이 된 위풍당당한 군복 차림의 초상이었다. 마침 이 시기의 천황제 국가 체제는 제국 헌법 제정을 축으로 그 기초를 확실히 다져가고 있었다. 1888년 6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추밀원에서 헌법 제정의 방침을 밝히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그는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우리나라의 기축으로 삼아야 할 것은 오직 천황 뿐'이라며, 국체(國體)를 헌법의 전제로서 밝혔다. [중략] 1888년의 '어진영'은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사진이 아니라 손수 그린 '그림'의 복사였다. 게다가 이것을 그린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콘테(Conte)화 ・석판화 ・동판화 등의 수법으로 초상의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외국인이었다.

즉, 1875년 대장성 지폐료(紙幣寮)의 초청으로 일본에 온 이후 장기간 고용 외국인으로서 지폐 원판의 도안과 제작 및 인쇄에 관여하다가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이탈리아인 키오소네(Chiossone)가 1888년 1월에 그린 것이다. 완성된 원본을 당시 동경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가 중 하나인 마루키 리요가 키오소네의 지도 하에 '몇 차례의 시사(試写)를 거쳐 수십일 동안' 복사한 끝에 '사진'으로 완성했다. 키오소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천황이 식사 초대를 한 것이 동년 8월이므로 제작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일반적으로 '사진'이라 통용되고 있는 '어진영'이 왜 이러한 제작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일까? 상술한대로 '천황이 촬영을 좋아하지 않아' 남은 사진은 모두 10여년 전 촬영한 것들 뿐이어서 외국 황족과의 사진 교환이 불편했기 때문에 궁내성 측근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었다.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리대신을 겸한] 궁내대신이었을 때에도 종종 천황에게 새로운 초상 사진의 촬영을 권했지만, 천황은 왠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대신이 되지마자 궁여지책을 내놓았다.

그 경위를 <메이지 천황기>는 1888년 1월 14일자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대신이 되자마자 천황 모르게 촬영을 하고, 그 책임을 자신이 지기로 마음먹고서 이를 식부관(式部官) 나가사키 쇼고(長崎省吾) ・시종(侍從) 자작 호리카와 야스타카(堀河康隆) 등과 협의하고, 시종장(侍從長) 후작 도쿠다이지 사네노리(徳大寺実則)에게 자문을 구했다. 마침 1월 14일에 야요이사(弥生社)로 행차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키오소네에게 천황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키오소네는 천황이 신하들과 식사하는 옆방에서 문틈으로 천황의 얼굴과 자세 및 담소를 나누는 모습까지 빠짐없이 자세히 그렸다. 이를 바탕으로 원화(原画)를 완성한 후 촬영했는데, 그 모습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제(聖帝)의 위용을 당당하게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히사모토 등은 천황에게 보여드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이어서 <메이지 천황기>에는 히지카타가 천황의 허가를 얻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한 후 '후일 천황의 어진영으로 널리 하사된 것은 이 원화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즉, 궁내성 측근들은 키오소네에게 스케치를 하도록 주문하고, 이를 바탕으로 천황의 좌상(座像)을 콘테로 그린 후 다시 그 원화 중의 하나를 복사해 사진으로 만들어서 '어진영'으로 통용시킨 사실이 의외로 담담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담담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시각적 표현 속에서 전개된 정치적 기술에 대한 실로 흥미로운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궁내성 측근들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제(聖帝)의 위용을 당당하게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감탄할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사실적(写実的) 회화와 사진을 구별하는 감성을 지니고 있었을까? 아니면 어느 쪽이든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지금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을 보면 '사진처럼' 잘 그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같은 회화와 사진의 혼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내성 측근들의 인식은 언어나 시각을 통해 현실을 탐색했던 메이지 초기의 리얼리스트들이 지녔던 지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진실의 탐구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정치적 차원에서의 효과 판단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과 회화의 무차별적인 혼동이 아니라, 매우 강한 정치적 전략에 바탕을 둔 이미지의 인식일지도 모른다. 사진과 회화의 구별에 관련한 메이지 정치가들의 감성을 의심하면서 그들의 무지를 비방하는 것은 너무도 단순한 방법이다. 어떤 의미에선 기호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인지한 후 그림을 사진으로 배포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완성품이 '사진'이어야 할 필요성만은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09년 11월, 도치기현 나스(那須)에서 거행된 육군 대연습을 참관하며 보고를 받는 중인 메이지 천황
            참모본부 산하 측량부의 사진반원이 포착한 장면으로 천황 말년의 용모가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아무튼, 이날 키오소네는 경찰관 무도 연무장에서 몰래 문틈 사이로 천황의 얼굴과 모습을 스케치하면서 천황의 순간적인 표정과 몸짓들을 생생하게 관찰하였다. '빠짐없이 자세히 그렸다'는 <메이지 천황기>의 서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스케치가 그려졌을 것이다. 스케치와 그림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듯이 초안(草案)과 작품이라는 단순한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림이 인간에게서 지니는 시야의 의미를, 넓게는 다양한 지각적(知覺的) 경험과 세계의 관계를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의 스케치에 의해서였다. 당시에 대형 그림을 위해 시도된 유채(油彩) 스케치가 다양한 시야들에 대응하는 다양한 이미지를 취합하고 자립시켰는데, 이것이 마침내 화면 구성의 해체를 초래하여 새로운 회화로의 길, 또는 지각(知覺)에 관한 이론 전체의 변혁을 일으키게 될 먼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키오소네의 방법은 거꾸로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인간의 다양한 인상을 종합하고, 이러한 인상을 초월한 유형으로서의 인간을 이미지화하여 그려내는 것을 지향했다. 더욱이 키오소네는 천황을 어떤 의자에 어떻게 앉히고, 어떤 포즈를 취하게 할지도 자신이 모두 결정했다. 물론 정부나 천황의 측근들로부터 바라는 바가 어느 정도 제시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착용하는 복장이나 훈장, 사용할 소품 정도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구도나 천황의 포즈는 전적으로 키오소네가 그때까지 축적해 온 인물 초상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스타일로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그는 매우 비슷한 천황의 초상화를 적어도 2장은 그린 듯하다. 훗날 천황의 어진영으로 하사된 사진과 현존하는 키오소네의 그림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서로 약간 차이가 보인다.

굳이 말하자면 복사한 원래 그림은 인물 주위를 조금 넓게 잡고, 배경을 더 구체화하여 사진처럼 그렸다. 또한 당시 그는 콘테화 초상 외에도 군인 복장을 입고 서있는 모습을 하나 더 그려서 커다란 동판에 새길 예정이었다. 이것은 그 제작에 어려움이 있어서 겨우 인쇄가 완성된 것은 키오소네가 지폐료를 퇴직한 후인 1893년이었다. 키오소네가 그린 천황 초상은 의뢰자를 매우 만족시켰다. 이 정도면 천황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측근들이 보더라도 천황과 매우 닮았으며, 천황을 이상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닮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측근의 지각엔 이미 천황에 대한 감정적 이입이 있다. 초상과 모델이 닮았다는 건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 우선 세부적으로 모델과 같은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최저한도의 조건이다.

키오소네의 이미지는 완전히 그 조건을 충족시켰고, 나아가 가장 바람직한 수정, 즉 천황 측근들의 기대와 일치하는 수정을 가하여 완성된 것이다. 그 수정이란 대상으로서의 현실을 관념과 이상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시각적인 특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의미와 결부시켜 가는 것이다. 의뢰자를 만족시켰던 것은 이러한 조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키오소네는 이미 이러한 방법으로 메이지 초기의 고위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였던 초상화를 다수 그려낸 실적이 있었다. 키오소네가 화가로 선택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서양인 그 이외에 이러한 초상화를 능숙하게 그려낼 사람이 [당시 일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상화는 19세기의 부르주아 고객들이 선호하고 소유하고 싶었던 모사이지만, 아무리 봐도 진짜처럼 보인 보수적 초상화 중 하나였다. 이 부분에서 그는 매우 뛰어났다.

- By 타키 코지(多木浩二) 著 <천황의 초상(天皇の肖像)>에서 발췌  

 


              메이지 천황의 7녀로 선제(先帝)와 매우 유사한 돌악형(突顎形) 외모를 가졌던 후사코(房子) 내친왕
              천황의 자녀 가운데 가장 장수한 인물로 후년엔 이세 신궁의 제주(祭主)로도 재직했다. 1927년 2월




덧글

  • 2017/06/17 12: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6/17 12:4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명탐정 호성 2017/06/17 18:41 # 답글

    저 시대에 저런 컬러 사진이
  • 心月 2017/06/19 21:49 #

    뤼미에르가 천연 컬러사진 기술을 출시한 이래 부르주아 매니아층 사이에선 제법 보급된 상태였으니깐요.
  • 2017/06/18 07:5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6/19 21:4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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