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사의 양차대전 전간기 미일관계 유감론 발언록




"가령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일본이 자원과 시장을 모색하는 것을 신중히 도와주도록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우리가 그들의 자유주의 세력을 고무해주면서 군국주의자들을 낙담시키게끔 노력했더라면 어땠을까? 중일관계의 발전을 장려하면서도 우리가 중남미에서 가진 것처럼 중국에서의 일본의 특권적 지위를 지지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러한 대안은 1933년 당시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배한 후 대일(對日) 정책의 반전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었다. 극동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인 견제 수단[=일본 제국]이 파괴된 결과, 우리는 중국에서 우리의 지위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문제까지 떠맡게 되었는데, 당장 결합된 중러의 동맹 세력과 우리 스스로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치력과 달리 일본인들은 이 모든 것을 막아냈을지도 모른다." 

- By 뉴딜시대 농정(農政) 브레인이었던 렉스포드 터그웰(Rexford Tugwell)이 FDR의 극동 외교를 디스하며




            1899년 4월 11일, 대(對) 스페인 전쟁 강화조약의 비준 동의서에 서명중인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
            필리핀 병합과 문호 개방이 공표되면서 미국 외교는 극동을 무대로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이런 견해에 따라 우리 정부[=미합중국]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가 확립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1908년의 루트-다카히라 조약은 이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건 간에 일본인들에게는 확실히 자신들이 만주에서 획득한 지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점들만 보더라도 '문호 개방(Open Door)'이나 '중국의 행정과 영토의 통일성' 같은 문구가 중국에서 실제로 진행된 상황에 분명하게 적용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납니다. 중국에 진출해있던 강국들의 온갖 특별한 입지와 이익[=특수 권익]에 대해 실제적이고 실행 가능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겁니다. 원칙이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곧 원칙에 건전한 요소들이 아예 없었거나, 진리와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확실히 중국에 진출한 외국의 입지들 가운데는 애초에 출발점부터 비난할 만한 점이 있거나, 외국인들이 기를 쓰고 획득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확실히 중국에서는 외국인들이 계속 새로운 사업을 벌일 테고, 미국은 이러한 사업을 우려와 반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또 미국 입장에선 그런 사업과 관련되거나 책임지는 것을 사양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문호 개방 교의(敎義)와 중국의 통일성을 정치적 원칙으로 내세울 경우의 문제는 이 표현들이 대외정책의 유용한 토대로 삼기엔 분명하거나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타국 정부들에게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하도록 요구했을 때에 이 표현들은 대단히 상투적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위험할 정도로 부정확하고 혼란스러운 연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이 '그야 물론, 당신들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우리야 동의하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이 통첩의 문구들에는 지나치게 많은 단호한 함의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마음 놓고 공공연하게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해명하려고 애쓰기보단 동의해주는 편이 더 쉬웠던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문구들에는 [청일전쟁과 북청사변 이후 반식민지화가 급속도로 진척되어가던]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만 관련된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각각의 경우마다 이 문구들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외국 정부들에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 문구들에 실질적이고도 충분한 일반적 의미가 있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이 문구들을 말 그대로 도식적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한다면, 모든 외국인이 중국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둬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던 간에 서구식 국가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려는 중국의 완강한 태도에 대한 일종의 징벌이나 보상으로서 중국과는 무관한 정책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도 나쁜 일은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최종 결과는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황보다 더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서구 강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기 전환기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든 현실적으로 수용할 만한 제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에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경향 때문에 필연적으로 [중국에 특수 권익을 보유하면서 활동중인] 외국인들의 마음속에 [미국에 대한] 당혹감 ・의심 ・걱정이 생겨났다는 사실입니다. 외국 정치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제안이 특정한 국제 쟁점에 관한 실행 가능한 합의나 이해의 정의로는 부적절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북청사변에 개입했던 8개 연합국의 논공행상을 추수감사절 만찬으로 풍자한 주간지 <Puck>의 삽화
              중국에서의 열강간 권익 쟁탈전에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엉클 샘'과 문호 개방의 본질을 묘사했다.




당시의 외국 정부들처럼 우리 정부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외국 정치인들로서는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합의의 기준으로 강요하는 우리 정치인들이 [중국에서의 권익을 침해하려는] 배후의 동기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저는 미국이 극동에서 추구하던 정책과 관련해 제기하고자 하는 더욱 중요한 두 번째 단서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은 특히 양차대전 전간기(戰間期) 일본과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 지역에서 우리의 외교적 압력과 비난의 주된 표적이 되었지요. 이 단서는 우리가 대체로 일반적인 원칙 뿐만 아니라, [중국 정세에 대해] 일반적인 조정조차 논의하기를 꺼려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반대하는 행동 방침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책임지기를 꺼려했다는 점과 관련됩니다.

우리 외교 활동의 대부분이 다른 강국들, 특히 일본인들이 [만몽과 중국에서] 우리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특정한 행동 방침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활동이었음을 유념하십시오. 우리의 견해를 따르면 그들과 중국에 실제적으로 심각한 영향이 미치고, 새로운 문제와 불편이 제기되거나 이 지역에서 힘의 요인들이 실질적인 불균형이 발생하며, 또한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고, 이런 책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일을 하도록 다른 나라들이 우리에게 역으로 요구할 권리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살펴본 이런 증거에 입각해 판단할 수 있는 한, 미국의 정치인들은 도덕적 원칙이나 법적인 원칙의 명의로 무엇을 공표하고 촉구하던지 간에 그것을 촉구했던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구체적인 책임이 부여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설령 이 원칙을 고수할 때 생기는 실제적인 영향이 급격하고 광범위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권고하고, 요청하고, 방해하고,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유념하지 않으면, 세계 여론이 주시하는 가운데 꼴사나운 자세를 드러내도록 만들면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촉구하는 내용에 유의하면 그에 따르는 위험은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우리는 결과로 생길 문제들에 관해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었지요. 바로 이같은 정신 아래 우리는 매년, 아니 수십년 동안 다른 강국들,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이 아시아 대륙에서 보유하고 있는 입지를 난도질했습니다. 우리의 원칙이 훌륭하다면 그런 원칙을 적용시킨 결과 또한 흡족하고, 수용할 만한 게 분명하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속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관련된 현실적인 많은 사안들을 [일본과] 논의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팽창하는 인구라든가, 중국 정부의 약점, 다른 강국들[특히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야망을 실제로 맞받아칠 수 있는 방법 등을 논의하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에 비해 아시아 대륙에 대해서 훨씬 더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들의 경우에 이런 사실이 특히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다는 점을 유념하십시오. 행동을 바꿀 경우에 자기보다 훨씬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행동을 바꾸라고 한다고 그런 요구를 선뜻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본인들과 영국인들은 언제나 우리가 중국에 대한 이해관계가 그들에 비해 훨씬 적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중국에서 보유한 '외교 자산'을 [미국의 문호 개방 구상에 부합되도록] 헤프게 쓰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1921년 11월 21일, 워싱턴 D.C.의 메모리얼 컨티넨탈 홀에서 개최된 5대 해군국 군축회의 석상의 광경
            워싱턴 체제에 대한 잠재된 불만은 장차 일본이 극동에서 현상 타파를 추구해가는 유인책이 되었다.  




우리는 또한 오랜 시기에 걸쳐 종종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일본 국내 문제의 관점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고려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워싱턴 회의와 9개국 조약, 영일동맹 해체, 스팀슨 독트린 등으로] 일본의 아시아 대륙 정책을 좌절시킨 댓가가 동경에서 군부 극단주의자들의 힘을 결정적으로 굳혀주는 것이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분명히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정치인들이 이따금 [테디 루스벨트처럼] 일본의 상황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미국의 정책을 조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몇 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전반적인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이었을 뿐, 미국 정책의 전체적인 특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일본의 감정에서 특히 [만몽 권익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면, 그것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의 심중에 1894년 청일전쟁 직후 외부 세력에 의해 승리의 결실을 박탈[=3국 간섭]당했다는 상처가 아직 남아있는 상태에서 그것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났을 당시 다시 일본의 승리를 좌절시키는 세력[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으로 재등장하는 사태를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차대전 직후에 거리낌없이 다시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이 독일에 맞선 전쟁에 참여해서 얻은 결실이라고 생각한 것, 즉 아시아 대륙에서의 입지 향상이란 성과를 빼앗으려는 단호한 움직임을 이끄는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말입니다. 또한, 이 불행한 긴 이야기 내내 미국의 특정한 지역들에서 이민 정책과 일본계 및 동양계 일반에 대한 처우를 통해 가뜩이나 예민한 일본인들을 거듭 자극시키고, 발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상황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이민법 성립 전후로] 연방 정부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여러 지방 당국에게 거주와 토지 소유, 일본인 밀집 지역에 대한 처우 등의 공교로운 여러 문제에서 국익의 요소를 인정하도록 기꺼이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서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라 전체는 여전히 주(州)와 지방 당국의 행동 및 태도가 대외정책을 수립하는데서 중요한 요소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말썽이 생기기 때문에 일본을 상대로 다른 요구를 하는데 있어서 보다 온건해야 한다는 점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자면 이런 것들은 쓰디쓴 성찰이며, 오해의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2차대전 이전 수십년 동안 극동에서 전개된 상황은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과정이었고, 인간사의 엄청나게 강력한 흐름이 여기에 휘말렸습니다.

미국인들은 이 과정을 거의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행동 원칙에 따라 움직였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장기간에 걸쳐 일본인들에 대한 태도에서 좀 더 신중하고, 그들의 입지 요구에 대해 좀 더 고려하고,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언제든지 그들 방식대로 논의했다면 진주만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의 정책 중에서 어느 한 가지 행동을 꼬집어서 바로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사태를 급변시킨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외정책 분야에서 우리의 행동은 차곡차곡 축적되며,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다른 사건들의 거대한 흐름과 맞물려 합쳐집니다. 그리고 일단 이 행동이 '역사'라는 유동체에 들어간다면, 정확하게 그 영향을 추적할 수 없습니다.




           1932년 5월 5일, 상해사변의 후속 처리를 위해 송호(淞滬) 정전협정 조인식에 출석한 일중(日中) 전권단
           테이블 좌측 중앙이 일본 해군 대표 시마다(嶋田) 소장이며 대미개전 당시 해군대신으로 재직하였다. 
 



태평양에서 2차대전으로 이어진 상황 전개엔 우리의 노력으로 여전히 무언가 희망적 결과를 이룰 수 있었던 국면과 이미 겉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버린 국면[이 시점에선 완전한 비극이 우리의 불행의 결정 요소로서 인간의 약함을 압도했습니다]을 가르는 구분선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시점이 존재했음을 단언할 수 없으며, 그 시점이 언제였다고도 확실히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미국이 장기간에 걸쳐 [유럽 열강과 일본이 균형을 유지하던] 동양의 힘의 현실을 진지하게 존중할 만한 하나의 요인으로 일관되게 인정하고, 법적 ・도덕적 깔끔함 뿐만 아니라 안정과 평온까지 추구하는 정책으로 사태의 추이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그런 정책으로 사태의 추이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활용하고, 가능성이 현실이 될 기회를 부여하며, 우리 자신의 이익과 세계 평화라는 이익을 위해 끌어낼 수 있는 이득을 이 가능성으로부터 끌어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현재 우리가 과거 아시아에서 [문호 개방을 빙자해] 추구한 목표들이 표면적으로 대부분 달성된 사실은 역설적입니다. 서구 강국들은 중국에서 특권적 지위를 모두 상실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결국 중국 본토에서 쫓겨났으며, 만주와 한국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본인들이 축출되버린 결과는 과거에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곧 경고한 바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이 반세기 가까이 한반도-만주 지역에서 봉착하고, 떠맡아왔던 [소련의 남하 및 팽창을 저지해야 하는] 문제와 책임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얕잡아 본 점으로 우리가 [한국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고약한 정의입니다. 무엇보다도 유감스러운 건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직시하는 이들이 극소수인 듯 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수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지난 반세기 동안에 걸쳐 미국이 극동에서 실천한 외교를 돌아보면, 우리의 정서적 컴플렉스에서 생겨난 것이 분명한 흥미로운 현상이 관찰됩니다. 이 지역에 대한 우리의 정책과 유럽에 대한 정책 사이엔 뚜렷한 차이가 보입니다. 동양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에는 유럽 대륙의 문제에 대한 접근법에서 우리에게 장기간 영향을 미친 것 같은 금기가 결여되었다는 점이 확인됩니다. 우리는 동양 문제에 기꺼이 관여할려면서 우리에게 이 문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넘겨버리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제까지 힘의 현실과 힘에 대한 열망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도덕적 판단의 의무조차 느끼지 않은 채 현실과 열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런 현실과 열망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간사에 존재하는 불변의 요인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개선하거나 억압하기보단 최대의 균형점을 찾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극동의 민족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중국인들에 대한 일정한 감상적 태도에 물들었습니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의 국내의 제도와 요구를 평가하는 판관일 수 없으며, 우리가 국내에서 하는 일과 시행하는 제도에 대해 타국인들에게 해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백인종이 아닌 경우엔 동화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나라는 타민족과의 관계나 그들과의 친밀한 교류를 기대하는데 특별히 신중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 by 1951년 월그린(Walgreen) 재단 강연에서 미국의 전간기 동아시아 정책과 그 오류를 비평하며
                                                                                   조지 F. 케넌(George F. Kennan)

 


덧글

  • 2017/07/25 13: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7/25 19: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7/31 23:0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7/25 17:0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7/25 19: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deokbusin 2017/07/25 17:15 # 삭제 답글

    1. 형식은 위작이지만 내용은 위작이 아니라는 다나카 상주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니얼 퍼거슨이 설명한 것처럼 일본은 명치유신의 주동자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제국주의 체제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어차피 중국을 완전 장악하는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완성하려면 세계 최대의 완전 개방된 자유시장인 중국에서 서양을 축출할 수 밖에 없었고요. 그러니 일본과 서양국가들과의 충돌은 케넌의 생각과는 달리 필연적인 코스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겁니다. 이것은 일본을 주도하는 세력이 군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자들이 군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높습니다.

    2. 게다가 도서국가의 시민들이 흔히 착각하는 국제정치 현상이 도서국가는 대륙에 간여할 필요가 없고, 굳이 간여할 경우라도 도서국가의 자유의지대로 해야 한다는 것인데, 당장 영국만 해도 대륙에 어떠한 동맹체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버 해협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불안정에 꼼짝없이 끌려간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일본도 중화제국이 내향적이던 전근대시기에는 무역을 제외하고는 대륙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한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진행되자 대륙으로 말려들어 갔습니다-무역상의 이익이든, 국방상의 안전보장이든 제국주의적 목표의 달성이라는 국책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도서국가도 결국은 대륙과의 안정적인 관계-새력균형이든 독보적 제압이든 상관없이-가 보장되지 않는 한 제대로 번영을 가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사에서 유례없는 특이 현상인 대륙을 일통하는 국가이면서 동시에 타 대륙들과는 대양으로 격리되었다는 도서국가인 미국이라도 자신의 번영을 지속화하기 위해서는 싫어도 타 대륙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반드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현실주의자의 이성적 분별처럼 보이는 케넌의 발언이 가진 최대의 문제점도, 자신의 편견에 사로 잡혀서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망상과 이성을 착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중국문명이 유럽문명과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것이고, 그 이질점이 19세기말~20세기 전반기의 서양의 우월성이 두드러지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중국문명의 열등함이 강조되었긴 합니다만, 바로 그 중국의 거대한 시장이 미국 경제에게는 필요했습니다. 중국과 맞먹는 인구를 가진 인도를 식민지화한 영국조차 자신들의 경제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중국으로 달려갈 정도인데, 미국이 우아하게 뒷짐지면서 일본에게 지저분한 중국을 맡으라고 촉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합당할까요? 오히려 망상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 心月 2017/07/25 19:52 #

    본문 어디에서 아시아 전체를 통째로 일본에 갖다 바쳤으면 태평양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 평화 또한 보장받았을거라는 주장이 전개되었다는거죠? 케넌이 지적한 건 문호 개방 정책이 가진 함의의 모호성 및 이상론이 취지야 좋을지 모르겠으나, 대외정책의 유용한 기반이 될 수 없을 뿐더러 극동에 선두로 진출해있던 유럽 제국이나 일본의 의혹만 사기 쉬운 요소가 내재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열강간에 상시적인 트러블 여지도 남겨둠으로써 이 지역의 세력 균형에 불필요한 리스크로 돌아왔을 뿐이라는 관측을 개진한 것일텐데요?

    거기다 아메리카식 법률주의와 도덕 관념이 반영된 문호 개방의 이념만이 가장 훌륭한 원칙이란 확신하에 기타 열강들에게 다짜고짜 준수하라며, 상투적인 통첩을 발령한데서부터 타국의 감정이나 배경 사정조차 고려하지 않는 미국 외교 역사에서 종종 보여왔던 특유의 오만함마저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원칙을 강제하다시피 하면서 정작 유럽과 일본인들의 제국주의를 대체할 만한 실속있고 장기적인 극동 질서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대륙에서 중대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예의 문호 개방의 원칙만 구관조처럼 되뇌운 게 중일전쟁 이전까지의 미국이 보여온 행태임. 설마, 순수히 청교도적인 선의만으로 중국 시장에서의 공평한 기회와 영토 주권의 존중을 표명했던 산물이었다고 당근 진지하게 믿으시진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일제의 전면적인 패퇴가 중국 공산화를 수반해 소비에트 세력의 팽창으로 귀결되었다는 결과론적 해석 역시 결코 틀린거라고만 할 수 없거니와, 어디까지나 전략적 계산의 관점에서 아쉬운 감정을 토로한 데 불과할 따름이죠. 냉전 초기 전세계에 걸쳐 대소 봉쇄를 위한 가용 자원이 지푸라기 하나라도 아쉬운 판국에, 한반도의 국지전에 여력을 투사해야 했던 최대 당사국의 책사로서 충분히 나올 법한 발언이었다고 봅니다만은?

    중국과 관련해서도 군벌이 쟁패중이던 전간기에야 대소 견제 및 세력 균형의 역할론적 측면상 평가절하한 건 트루지만, 중공이 성립되고 역내 강국으로 복귀하면서 케넌의 대중관 또한 일변함. 근본이 민족주의자인데다, 당내 입지 강화를 위해서라도 언젠가 모스크바와 결별하게 될 마오를 동방의 티토로 회유하자는 쐐기 전략을 키신저보다도 거진 4반세기 앞서 제안한 양반임. 백인종과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에서 약간 오리엔탈리즘적 성향이 드러나긴 하지만, 대체 어디에 중국인이 일본인보다 열등하다고 언급한 바가 있음?

    그리고 하나 더. 인간이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자신의 번영을 지속화하기 위해선 자의든 타의든 팽창주의가 불가피하다고 하셨는데, 님의 주장대로라면 전간기 인구 과밀화와 식량난 공포의 중압감에 시달리고, 공황이 만성화되다시피했던 '못가진 제국' 일본의 경우에 대해서도 그런 논리가 성립될 수 있으며, 국가 자위와 생존을 위해서 만몽의 점유라던지 중국 '진출'은 불가피하고도 정당한 과정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겠군요?ㄲㄲ
  • 공손연 2017/07/26 01:03 # 삭제

    다복신//

    1.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일부정치인들과 군부의 폭거에 가깝고 전략적인 이해하고 무관합니다.굳이 일본이 중국의 전국적인 지배에 의미를 두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2.중국은 당시 수준에서는 열등한 국가이고 결코 유럽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지역은 아니었죠.실제로 그랬고 단지 영토가 크고 인구가 많다는 것 하나로 중국을 직접 지배하고 정복할 상황도 아닌데 미국이 그런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당신의 자의적인 환상이라고 볼수있죠.
  • 산마로 2017/07/25 17:34 # 삭제 답글

    케넌이 아시아 사정을 몰라서 그런지 헛소리를 했군요. 나치 독일에 유럽을 맡겨서 소련의 서진을 막는 책임을 맡겨야 했다고 바꿔 말하면 저게 얼마나 멍청한 소리인지 바로 깨달을 겁니다.
  • 心月 2017/07/25 19:41 #

    일본한테 아시아 전체를 위임하자고 한 적 없다는데도요? 문호 개방의 본질에 내포된 미국의 타국 열강에 대한 견제 심리, 특히 대일관계를 융통성없는 원칙론 하나에 매달린 나머지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 부분을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뜻이죠. 사전 협의나 양해도 없이 일본의 권익을 훼손시키는 인상을 줄 법한 각종 계약과 군축을 반강제해가던 과정에서 어쩌면 일본 국내의 군부 및 강경파들의 입지만 더욱 키워준 게 아닌가, 나아가 강온파를 막론하고 일본이 영미와의 협조에 대한 미련을 버린 채 현상 타파 노선으로 경도되게끔 유도하면서 그것이 태평양전쟁 발발의 무시 못할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 또한 적지 않을거란 견해가 포인트이니깐요.
  • 얼음집주민 2017/07/25 23:11 # 답글

    일제에 대한 고압적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일제 내에서의 군국주의자의 발호를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어 일제가 폭주하게 된게 1차적 미국의 삽질이었다면 전후의 제국 해체작업은 2차적 삽질이겠지요
    만주까지 혹은 만주사변 이전의 일제의 영토를 보존하고 천황을 막후 삼아 군부만을 제거하여 내각에게 군지휘권을 양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도하는 결과를 내어 꿀을 빨 수 있었을텐데 제국해체, 일본군해산, 평화헌법이라는 희대의 뻘짓으로 지금껏 일본은 미국 뒤에 숨어서 안보무임승차하고 앞으로도 계속하겠지요. 미국의 푸쉬를 받아 개헌한다는 아베상은 지지율에서 이젠 가망이 없어 보이니 말이죠
  • 心月 2017/07/26 13:37 #

    군부의 폭주가 전적으로 미국 정책의 졸렬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식의 앞서간 주장은 아니죠. 다만, 전전의 일본이 직면하고 있었던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고려 및 관찰없이 대륙의 권익마저 파토시키려는 듯한 미국의 무신경스런 행태가 미일관계 전반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일본내 강경파의 득세에 일조함으로써 분쟁의 씨앗을 키웠다는 해석 자체는 파격적이면서도, 꽤 음미할 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기사, '일제=절대 악'이라는 모태신앙적 공식에만 익숙한 반도인들이야 케넌옹의 저런 수정주의적(?) 판단을 견딜 수 없어하겠지만요.ㅋ

    아베상이야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것과 달리 조기에 실각할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만, 국정 동력이 저하된 이상 앞으로 당분간 지지층 다잡기에 진력할테고, 개헌은 좀 힘들다고 봐야겠죠. 한 5~10년 후라면 모를까.
  • 킹오파 2017/07/26 00:30 # 답글

    나는 일본이 짐을 질 이유는 없었다고 봐요. 저는 청일전쟁 끝나자마자 대만과 해남도를 일본령으로 만들고 보상금을 받아 러일전쟁을 피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일본 자신을 위해서라도 좋았을것을..이토 말대로 남이요. 무쓰 말대로 남인데 대체 왜...
  • 파파라치 2017/07/26 10:32 #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를 장악할 경우 일본이 받게 될 위협을 고려할 때 대만과 해남도 따위가 무슨 위안이 될지 모르겠군요. 러일 전쟁에 대해서 이토나 야마가타나 다같이 찬성한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생각이 갈린건 러일전쟁 이후의 수습 방향에 대해서죠.
  • 킹오파 2017/07/26 10:32 #

    이토는 중국과 협상하고 있었다. 조선 반도 영세 중립화를 목표로... 전봉준의 봉기가 나지 않았다면 협상은 타결되었을거라고 아쉬워 하는 일본 사이트의 글도 있고... 이토와 야마가타는 청일 전쟁 반대파 무쓰는 청일 전쟁 찬성파였다. 러일 전쟁은 이토와 야마가타는 반대했고 무쓰는 모르겠다. 무쓰는 청일전쟁 와중에 폐결핵으로 죽지 않았소?

    무쓰는 조선 따위 독립을 상실할 시 러시아에 맡기라고 한바 그는 러일 전쟁을 아주 철저히 반대했을게 틀림없습니다. 이토와 야마가타보다 더...
  • 파파라치 2017/07/26 10:31 #

    이토가 러일전쟁 직전까지 러시아와의 교섭을 추진했던 건 사실이지만, 1904년의 어전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한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토가 러일전쟁을 반대했다고 주장하시는지?
  • 킹오파 2017/07/26 10:34 #

    난 청일 전쟁 때 일본이 승리를 한 다음에 중국 대륙 땅에 찝적대지 않고 대만과 해남도를 차지 하는 선이라면 러일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봐요. 북수남진... 사쓰마번 당주인 사람이 했던 주장인데 제가 일본이라면? 처음에 생각했던 거와 일치하던거더군요. 난 해남도를 추가한거지만...
  • 파파라치 2017/07/26 10:38 #

    1905년의 세계는 지금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사실 지금이라고 해도 한반도가 완전히 친중 세력으로 돌아선다면, 일본이 느끼는 위협은 만만치 않을 겁니다.(예를 들어, 제주도에 중국의 해군 기지가 건설된다면?) 그런데 지금보다 훨씬 노골적인 무력 행사가 횡행하던 제국주의 시절에 러시아가 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할때 일본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킹오파 2017/07/26 10:43 #

    일본 경제학계와 제계는 조선을 병합하는 건 쓰잘데기 없는 "세금낭비" 라고 팩트 폭격을 했습니다.
    조선 따위 러시아령이 되는게 폭주와는 별개로 일본에게 그게 더 좋았다.
    무쓰는 일본 제계와 경제학계가 한 말을 사실 그대로 얘기한 거에 불과하다.

    무쓰의 논리는 이러했다.

    "조선을 병합하여 일본의 국익을 훼손하려는가? 조선 따위를 방치하여라. 조선이 설령 러시아령이 될지라도 그것은 타민족의 문제이다"
  • 파파라치 2017/07/26 10:46 #

    최근 전위대님의 포스팅에서 잘 설명했듯, 제국주의는 경제적으로는 낭비에 가까웠습니다. 그렇지만 만주와 한반도가 위협적인 세력에 들어가게 놔 두느니, 돈낭비라도 저지선을 현해탄이 아닌 두만강이나 흑룡강에 두는 것이 현명한 거지요. 조선은 일본 입장에서 남이지만, 그 남이 자기한테도 위협이 될 것이 분명한 적의 손에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차지하는게 이익입니다. 그건 사실 모든 군사전략가에게 필연적인 딜레마이기도 하고요.

    쓰다보니 일본의 입장을 옹호한 격이 된 것 같은데, 히로히토 개새끼.
  • 킹오파 2017/07/26 10:50 #

    파파라치// 아니 아니... 난 이토와 무쓰가 옳다고 봐요.
    이토 말대로 남이고 무쓰 말대로 남이야.
    조선 따위 무쓰 말대로 러시아령이 되는게 폭주와는 별개로 그게 더 나았어.

    35년간 128억엔을 쏟아붓을 만한 가치가 조선 따위에 있다고 보는지..
    더군다나 조선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세금이라고는 토지세 걷었는데 그게 조선 총독부 월급의 10분의 1도 안되... 그럼 무슨 의미가 있지?

    그래서 내가 이마무라에게 질문을 했지

    "조선이 누구의 령이 될지라도..." 그냥 맡기라고 한 사람 없어... 조선을 타국에 맡기라고 한 사람?
  • 파파라치 2017/07/26 10:50 #

    일본이 조선이 예뻐서 병합한게 아닌 이상, 남이냐 아니냐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안보에 투자하는 돈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낭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군대 같은건 없애는게 맞겠죠 -ㅅ-
  • 킹오파 2017/07/26 10:54 #

    제국주의 시절조차 한국은 버릴 패...즉 무가치...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한국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다를바 없다.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전쟁을 하면 한국인들이 신경이나 써?
    한국도 그와 마찬가지다.

    역사가 이토와 무쓰가 옳다고 증명을 해요. 미국도 무가치를 돌보는거에 싫증을 내는 판국에..

    맥아더는 일본 제국을 해체 시킨것을 미국의 대 실수라고 판단했다.(근데 도쿄 재판 주도한건 맥아더 본인이었잖아..) 그 판단은 옳았다. 이제 미국인들이 일본의 짐을 지며 일본이 안보 무임승차를 누리는 동안 미국인들의 피와 돈으로 희생을 해야 하니까..
  • 파파라치 2017/07/26 10:58 #

    한반도에 별 가치를 두지 않았던 이토가 결국은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등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도 생각해야 할겁니다.(그정도로 끝내는게 우리로서나 일본으로서나 다행이었겠지만...)

    그리고 1941년 12월 이후 미국은 이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 전이라면 몰라도.
  • 킹오파 2017/07/26 11:02 #

    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피할수 있다고 봐요. 러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미국 스스로가 외교 개념이 박혀 있다면...
    러일 전쟁 이후 미국은 오히려 일본을 경계했으니까 실상 테디 말대로 고기방패로 써야 하는데...
    당시의 미국 위정자들은 테디 말고는 외교 개념이 종범이었음.

    그리고 일본은 러일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왜 남의 나라에 일본이 전쟁에 휘말려야 하는가? 남인데...
  • 킹오파 2017/07/26 11:08 #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는 조선을 러시아에 맡기라는 무쓰가 옳았다고 봅니다.
    물론 이토가 더 옳고요.
    폭주와는 별개로...
    일본은 섬나라이고 해양세력이다. 무가치를 병합할 이유 따윈 없어요....
    대륙 세력인 중국이야 무가치를 병합할 가치를 느낄지 모르지만...
  • 공손연 2017/07/26 01:13 # 삭제 답글

    저의 생각으로는 일본이 처음부터 적절한 시기에 굴복했어야 성립되는 전략이 아닌가 싶습니다.확실히 일본은 미친세상의 미친놈들이었고 기어이 맞을이유도 없는 핵폭탄을 맞았는데 이런 상대에게 굳이 미국이 그런 기회를 줘야할 이유는 없는것 같습니다. 미국입장에선 당시의 일본 그자체로는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줄 확신을 가질 근거가 없어요. 일본의 전쟁기간의 행태때문에....그래서 일본제국의 해체자체에는 필연적이라는데에는 동의하지만 다복신같이 전략적인 의미를 잘못이해하는 것은 틀렸죠.

    분명 지정학적인 상황에서 일본의 역할은 미국에게 필요하지만 존재자체가 is급의 막장행태를 보인만큼 일단 멸망부터 시키는게 답이었습니다.맥아더가 천황을 내버려둔것만 해도 기적이죠.
  • 킹오파 2017/07/26 01:38 #

    조센은 무가치인데 미국이 스스로 짐을 졌잖소. 난 정신병자 짓이라고 생각하다만?

    무가치를 왜 방어함? 남인디...

    에치슨 라인이 보여주잖소. 조센은 그냥 미국 입장에서 짐이라는거... 아직도 현실파악 못함?
  • 공손연 2017/07/26 01:50 # 삭제

    그렇게 앵무새처럼 읊어보아야 댁의 편향적인 인식외에는 확인할게 있음?
  • 킹오파 2017/07/26 01:54 #

    그러니까 왜 미국이 일본의 짐을 지냐고? 이게 뭐하는거야?

    미국이 왜 무가치를 돌봐야 하는데 당신이 망상한다고 현실이 달라져?

    당신이 아무리 그런 얘기를 해도 에치슨 라인은 미국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이에요.
  • 킹오파 2017/07/26 02:14 #

    그러니까 당신이 말한건 일본제국의 멸망을 시킨건 잘한거라 하는데 미국 입장에서 일본의 짐을 스스로 지고 일본은 안보 무임승차로 부자가 되고..

    미국인들은 죽어나가서 일본과 전쟁한 맥아더가 후회한 마당에 당신은 무슨 망상으로 일제 해체를 잘한 짓이라 하는지? 정작 일본과 전쟁한 미국인들은 평가가 다른데?

    만약 당신이 미국인이라면 난 당신을 이렇게 평가할껍니다. 스스로 일본의 짐을 진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인이라고...
  • 心月 2017/07/26 15:58 #

    공손연//

    '적절한 시기'라는게 정확히 언제 어느 시기를 지칭하는거죠? 세간에서는 흔히 쇼와초기 일본 군부의 막가파식 행보를 가십거리삼아 만주사변 혹은 파멸이 예정된 중일전쟁 이후의 사건 전개만 놓고 설왕설래하는데, 저자는 거시적 통찰에 입각하여 외교사적으로 접근해서 미일간 불화의 근원은 무려 미국이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했던 20세기 첫해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한 것이며,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사료됩니다만?

    번벌 원로 그룹의 존재가 사라지고, 정당내각마저 기능 부전 상태로 빠져드는 바람에 군부에 대한 통어가 더욱 어렵게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일본이 폭주하게 된 계기가 과연 군부가 대두하기 앞서 국내적 요인 외에도 국외적 요인, 예컨대 외부로부터의 압력과 전연 무관했던가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말이죠. 그 외부적 요인이란 케넌의 해석을 따르자면 대전 전간기 미국의 일관성없는 대일 견제정책을 가리키는 것일테구요.

    게다가 상황이 나름 정상적으로 굴러간 다이쇼 후기, 심지어 런던해군조약이 비준된 만주사변 바로 전해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스스로 체면 손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외교적 타협을 모색하려는 세력들이 의사 결정에 주도권을 행사했던 만큼, 양국이 유연하게 대처하며 오해를 불식시켰더라면, 화해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을거라 추측한 것은 무리가 아닐겁니다. 실제로 일본이 '굴복'하는 댓가로 워싱턴 체제의 제약과 9개국 조약에 따른 문호개방 원칙 수용이 관철된 선례가 있었으니깐요. 단지 미국이 너무 노골적으로 중국 대륙에서 일본이 보유한 합법적 권익마저 위축시키려 든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고, 하필 이민법 같은 병크도 덩달아 저질러가며 무신경하게 일본 여론을 자극시킨 나머지 불필요한 감정적 대립까지 초래한 점은 유감스럽다, 바로 이걸 꼬집은거죠.
  • 공손연 2017/07/26 17:50 # 삭제

    최소한 자국의 생존을 위해 무조건항복을 앞당길만한 책임감이 일본정부에 있어서 국체를 위해 옥쇄하며 저항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죠.

    선견지명이 있었으면 미드웨이에서 깨지고 조건부항복을 제의했을테고 사이판에서 동경폭격이 개시되는 시기부터는 무조건항복을 할수있어야 했는데 원리주의에 사로잡힌 경직된국가이기에 불가능했고 멸망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때 일본은 명치시대의 일본이 아닌데 지나치게 나이브한것 같습니다.북한에게 기대하는 햇볕정책과 다를게 없잖아요.당장 자기앞가림도 못하는 자폐증에 걸렸는데 미국이 뭘 기대할수있겠습니까?
  • 心月 2017/07/27 03:00 #

    재차 말씀드리지만 저 가설은 문호개방 원칙의 준수라는 여부와 관련해 일본이 자존심 굽히고 협조외교 노선을 견지하며, 그럭저럭 순응할 의사가 남아있었던 30년대 초반까지의 역사 경로를 염두에 두고 전제한 것입니다. 원리주의에 사로잡힌 꼴통 군부가 국가 명운을 좌지우지한 채 대동아 공영이니, 1억 총옥쇄론 따위 운운하는데 끌려다니다가 원폭 세례로 귀결된 중일전쟁~2차대전기의 일본에 대입시킨 논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본 포스팅의 최상단에서 별도로 게재한 터그웰의 발언이나 케넌의 해석을 종합해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과의 '정상적인 외교'가 아직은 가능했던 20년대부터 국제연맹 탈퇴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미국이 줄곧 실천해 온 극동 정책의 구상이 정말로 합리적이기만 했었는가에 대한 의문과 반성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잖아요?

    선견지명과 전략은 부재하면서 단기적인 탐욕에만 눈이 먼 제국 말기의 군부를 비난하는거야 누구나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면에 나서서 폭주가 가능하게 된 배경엔 미국의 사려심이 결여된 대일 접근 태도가 일본내 온건파의 입지를 약화시켰을 뿐더러 애지중지하던 대륙 권익에 대해서도 공식 양해는 커녕 워싱턴 회의 이래 별의별 구실을 갖다 붙히며 견제하려는 제스처를 거리낌없이 자행한 바람에 대미감정의 경화에 일조하지 않았나하는 점이 중요한거죠. 덕분에 협조 외교와 국제법에 대한 회의적 여론이 확산되면서 극단주의가 발호할 토양이 조성되는데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인데, 꼭 타당성이 없는 것만도 아니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당장 포츠머스 조약 직후에도 이제 막 인수한 만철의 경영에 착수하려는 참에 미국이 철도 중립화를 거론하며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전례가 있었던 만큼, 불신의 뿌리가 알게 모르게 깊었기에 더더욱 저런 소리가 나오는 것인데, 왜 자꾸 무의미하게 군부독재 치하의 대전 이야기만 강조하시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중일전쟁이 확전으로 들어간 시점부터 어느 누가 기대를 한다고 했습니까? 그 전사(前史)를 재해석하고 비평한건데요.
  • 공손연 2017/07/27 12:57 # 삭제

    일본군부의 폭주는 일본제국의 사상적 실패에서 비롯된것이고 마찬가지로 작금 조센의 반일 망동적인 세태도 국가발전에 매진하던 박정희시대에 뿌려놓은 민족주의가 싹을 틔운것이지 갑자기 다른 외부변수가 만들어낸것이 아닙니다.
  • 心月 2017/07/27 15:31 #

    그 외부 변수조차 하루아침에 갑툭튀한 게 아니라, 20세기 첫해를 분수령으로 차곡차곡 쌓이다 일련의 거대한 흐름을 양산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근대 천황 대권주의 테제가 정비되고, 군벌이 태동한 유신 무렵부터 정부 차원에서 장기 플랜으로 대륙 경영 야욕을 은폐해왔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거니와, 애초에 그런 사상적 실패로 말미암아 패망의 불씨를 내재하고 있었다면 프로이센 모델을 본따 통수권 독립의 조문이 명시된 메이지 헌법 제정 직후에 적어도 청일-러일전쟁 때 범국가적인 폭주가 시작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잖아요?

    막부 이래 민간의 일부 국학파나 우익을 중심으로 이따끔 거론된 팽창론을 후대의 대동아 공영권과 오버랩시켜 제국 패망이 필연이었다고 단정하는 건 순전히 결과론적인 인식에 따라 과정을 끼워맞추는 격이죠. 동시대의 제국주의 열강이라면 '명백한 운명'과 '백인의 책무'처럼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증상에 가까웠는데, 굳이 일본만 별종 케이스로 분류시키려는 것도 반도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감정적 주관에 입각한 편견의 발로라고 봅니다.
  • 파파라치 2017/07/26 10:27 # 답글

    1920년대까지의 "상대적으로 얌전한" 일본을 기억하는 외교관으로서는 생각할만한 시나리오지만, 당시 일본 국내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이 언제까지 영미 중심의 국제질서에 순응했을지는 의문이네요. 아직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질서가 표면상으로는 건재하고, 독일이나 소련이 기존 세계 질서에 대해 공공연히 도전장을 던지는 1930년대의 상황에서 일본의 민간 정부가 군부를 어디까지 제어할 수 있었을까는 어디까지나 상상 내지는 기대의 영역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구미세력이 중국에서 완전히 축출된 1949년에 와서는 일본이 중국에서 우월적 지위를 추구하는 것 정도는 받아줄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1938년의 시점에서 미국이 일본의 중국 장악을 과연 용납할 수 있었을까요?
  • 心月 2017/07/26 15:55 #

    군부를 제어하지 못하고, 여론 또한 친군 팽창주의로 경도되거나 전향한 3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이 그런 폭주로 치달아 현상 타파를 추구하게 된 동기와 원인의 역사적 배경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국제 협조주의가 설득력 및 기반을 상실해간데엔 비단 일본 국내의 모순 이외에도 외부적 요인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가가 논제의 핵심이잖습니까. 그 외부적 요인으로 미국의 문호개방 정책이 빚은 상호 불신을 지목하는 것이고요.
  • 2017/07/30 18: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8/02 10: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ㅋㅋㅋ 2017/08/04 10:42 # 삭제 답글

    여기 친일파님들 의견은 마치 오늘날의 종북주의자들 의견을 보는 것 같네요. 북한에게 돈도 갖다주고 김씨 일가의 권익을 보장하면 되는데 계속 제제를 가하며 막다른 골목으로 김정은을 내모니까 핵실험도 하고 미사일도 쏜다며 미국과 한국의 보수파, 오늘날의 일본을 비난하는 논리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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