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팽창이야말로 민족의 활력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세계사








"당시 우리 관민(官民) 사이에서 한국 병합의 논의가 적지 않았지만, 병합의 사상은 아직 충분히 명확하지 않았다. 혹은 일한(日韓) 양국을 대등하게 합일(合一)한다는 것과 같은 사상도 있었다.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종류의 [동군연합] 국가를 만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자도 있었다. 따라서 합방(合邦) 혹은 합병(合倂) 등의 문자를 사용한다던가 했는데, 나는 한국을 완전히 폐멸(廢滅)로 이끌어 제국 영토의 일부로 삼는다는 의향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그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 문자를 고르기를 바라면서 종종 고심하다가 마침내 적당한 문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므로 아직 일반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은 문자를 고르는 편이 득책이라고 인정해 병합(倂合)이란 문자를 전기(前記) 문서에 적었다. 그 이후로 공문서에다 병합이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그대로 부기했다."

- by 1913년 3월, 조선 총독부 외사국장 앞으로 발송한 각서에서 병합 당시의 용어 선별 경위를 해명하며
                                                                                                      구라치 데쓰키치(倉知鉄吉)



더 이상 공식 군사 보고서의 관례에 얽매이지 않은 그는 넓찍한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렸다. <대일본(Dai Nihon)>의 제1장 첫 문장은 서문에 인용되어 책의 목적을 명확히 밝혔다. 일본이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일으킨 '강철의 폭풍'과 '참된 정치적 결말'로 여겨진 한국 병합이 야기한 일본의 '회춘'을 두고 중부 유럽의 관심을 유도하고자 했다. 가장 구체적으로 이 책은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의 평화주의 저작 <거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의 그릇된 교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영국계 미국인 언론인은 군사력과 전쟁 자체가 무익하며, 어떠한 국가의 상업적 이익도 가져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가 전쟁을 통해 다른 국가의 부(富)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우스호퍼는 에인절이 전쟁의 '창의적이고도 재생산적인' 측면을 완전히 놓쳐버렸다고 주장했다.

특히 강대국의 지위를 갈망하는 국가들은 전쟁이 '존재할 권리에 대한 최후 ・최대의 위대한 시험'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만족한 열강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독일은 세계적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치뤘던 산고(産苦)를 팽창을 통한 위대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신호가 아닌 물질적인 안락함과 사치에 탐닉하는데 써버렸다. <대일본>은 군대 보고서에서 하우스호퍼가 현대 일본의 본질로 간주했던 요소들을 되풀이해서 설명했다. 2천년간 지속된 왕조의 통합된 군사 지휘권, 강력한 4천여 사무라이 가문들로 구성된 지배 계급의 전사적 윤리, 가족과 국가, 천황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개인의 의향, '삶의 절제'를 강요한 자살 숭배, 그리고 말레이 ・몽골 ・아이누 족속의 상서로운 혼혈. 이 모든 요소들이 융합되어 높은 '인종적 가치'를 창출했고, 그 가치로 국가의 활력을 이끌어냈다.

'그 활력에 대한 가장 어려운 시험은 틀림없이 계속될 전쟁'이다. 일본은 '민족의 활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대'된 '전쟁의 진정한 결과'를 세상에 과시했으며, 그것은 에인절의 책에서 찾아낸 것이 아니다. 중국 ・러시아와의 전쟁은 일본에게 '강력한 새로운 과제'를 주었고, '새로운 성장과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새로운 영토'를 제공했고, '민족적 활력의 모든 근원에 새로운 자양분'을 공급했다. 오직 전쟁만이 한 두 세대에 걸친 평화 후에 민족의 활력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쟁'은 에인절이 설파했듯이 비단 국가 경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동 공간 확보의 투쟁'을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전쟁은 냉엄한 현실이며 '이타심의 교육자'였다. 일본은 '세상의 법칙은 끊임없는 투쟁이지, 지속적인 정체가 아니'라는 것으로 '향후 나아가야 할 길'은 단 하나 뿐임을 입증해 보였다.

일본인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은 하우스호퍼에게 '인생의 시계'라는 단어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에 비유하자면 프랑스는 오후에, 영국은 정오에, 독일은 오전 11시에, 일본은 동트기 전의 새벽에 서 있었다. 그에게 전쟁은 일본의 '영구적인 한국 병합'을 의미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속령 '조선(朝鮮)'으로 변모한 것은 '모범적이고, 마찰 없는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급진적인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그는 한국의 '40만 특권층 놈팽이들의 지배 하에 놓여진 1200만명의 쇠약해진 신체'가 '남성적이고, 확신에 찬' 메이지 일본에 병합되었다는 사실을 흡족하게 여겼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은 대다수 주민들 뿐만 아니라 학자 ・관료 ・군사 엘리트들조차 둔감하면서도 병합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었다.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으며, 실제로 한국인들은 자유를 위해 싸우거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요컨대 한국은 '이보다 더 좋은 운명을 맞을 자격이 없었다.' 일본의 점령은 능수능란하고 사려깊게 계획되었으며, 질서와 번영의 축복을 한국에 내려주었다. 약 1만 3천명의 일본 경찰과 훌륭한 정탐 조직들이 혼란으로부터 질서를 회복시켰다. 불만을 품은 관료들과 지식인, 장교들도 새로운 질서에 간단히 끌려들었다. 진정한 '황금의 물줄기'가 한국으로 흘러들어 왔다. 35개의 새로운 비단 농장, 21개의 양잠업 훈련 학교, 13개의 비단 제조 공장, 217개의 직업 훈련 학교와 140개의 사립 및 공업학교, 그리고 8개의 종이 공장이 이러한 아낌없는 선물의 결과였다. 일본인들은 더 나아가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고, 늪지들을 배수하고, 개천의 오물들을 청소하면서 진해 ・인천 ・남포 ・부산 등의 항구를 근대화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였던 한국인들은 일본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메이지 정부의 과두 지배자들은 약 5백명의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을 추방했는데, 이들이 '우선적으로 그들 종족의 기수이자 신앙의 두 번째 사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합된 한국의 국경지대 후방엔 그것보다 더 거대한 목적이 있었다. 하우스호퍼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백작에게서 귀띔을 받았다. 1910년에 이 전직 수상은 '승천(昇天)하는 일장기 아래 한국과 대만(臺灣)이 조국에 편입'됨으로써 대일본 제국이 열강의 선발 클럽에 진입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오쿠마는 연간 5~60만의 인구 성장률을 감안하여 일본 ・한국 ・대만의 현재 인구는 2세대만에 1억명에 도달해 일본을 세계적인 주요 국가로 만들 것이라 예견했다. 하우스호퍼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평생 한국에서 만주로 이어진 광활한 토지를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도적 역할의 핵심 수단으로 묘사했다.

- by 홀게르 H. 헤르비크(Holger H. Herwig) 著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 평전 <지정학의 악마>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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