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야망과 현실적 평화라는 딜레마에 방황한 카우디요 세계사








프랑코 체제가 대중의 동의나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해 추진한 정책을 우선 프랑코 총통의 신화, 민족 가톨릭주의, 교육, 문화 정책, 이렇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프랑코 총통의 신화화(神話化) 작업이다. 프랑코 체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탈리아의 파시즘 및 독일의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신화와 상징과 의식을 사용했다. 신화와 상징, 의식이 대중의 정서와 감정, 상상력을 사로잡아 그들의 적극적 지지를 확보하는 수순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은 최근 파시즘과 나치즘 연구자들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 프랑코 체제의 신화는 대다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국가(Nuevo Estado)' 내에서 가장 파시스트적인 분야로 언론을 꼽을 수 있는데, 프랑코 정권은 이를 통해 독재에 매우 유용한 신화를 만들어내어 확산시켰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코를 '평화의 총통'으로 신화화한 것을 들 수 있다. 1940년대초 스페인 사람들을 사로잡은 테마는 억압과 질병, 기아 ・암시장 ・전쟁이었다. 이 가운데 2차대전은 스페인이 내전의 참상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또다시 전쟁에 휘말렸다간 나머지 요소들이 더 악화될 소지가 있는 가장 큰 문제였다. 따라서 스페인 국민 다수가 참전에 반대했다. 하지만 프랑코의 시각과 이해는 이와 정반대였다. 그는 내전에서 승리한 지 1년 반도 미처 경과하지 않은 상태라 물자와 사기가 여전히 바닥에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평화와 복지보다는 자신의 야심을 앞세워 참전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를 물리친 후 북아프리카에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코는 이러한 야심을 구체화하기 위해 1940년 10월 23일, 엔다예(Hendaye)에서 히틀러와 회동했다.

당시 프랑코는 평화주의적 감정이나 친(親)영국적 감정이 '빨갱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엔다예 회동에서 프랑코에게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스페인은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사실 프랑코가 참전을 모면하려 했다기보단 스페인의 역할을 과소 평가한 히틀러가 스페인의 즉각적인 참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재 체제를 사회적으로 수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정치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것은 곧 프랑코가 평화의 수호자라는 신화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신화는 체제의 공식 선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페인 국민들 다수의 갈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들은 국내의 사회 ・경제적 재난과 유럽 정세가 점차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독재 체제가 평화를 유지해 줄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대중은 독재자의 진정한 의도를 당시는 물론이고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몰랐다. 마드리드 주재 독일 대사의 정통한 소식에 따르면 프랑코는 '국내의 대중적인 정서나 영국의 선전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진실이었다. 전황의 주도권이 연합국에 넘어간 1943년 4월, 미국 대사 칼턴 헤이즈(Carlton Hayes)는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거의 모든 계층의 스페인 사람들로 하여금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고, 스페인을 국제 분쟁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희망하면서 프랑코를 지원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영국 대리대사 제임스 바우커(James Bowker) 역시 1944년 11월, '적어도 현(現) 체제는 전적인 부패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법과 질서, 생명과 사유재산의 존중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다. 그래서 공화국 말기의 상황보다 훨씬 나은 조건이라고들 한다'며 본국에 보고했다.

프랑코 체제는 40년대 중반 이전에 '프랑코의 평화' 중심의 정치적 신화 제작을 마무리했다. 이 신화가 성공을 거둔 이유는 다양하며, 이들은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일상 생활의 파괴와 폭력, 분열의 과거 이미지에 맞서 안정과 정상화에 대한 스페인 국민들의 필요성에 신화가 쉽게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체제의 외적 어려움과 상징적 판결[내전 승리]이 친(親)프랑코파가 아닌 계층마저 포함하는 광범한 사회 계층 속에 민족주의적인 정서를 불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정권이 언론 조작과 공식 선전 활동을 통해 이같은 정서와 사상을 자극시켰고, 더 나아가 이를 체제의 존립에 대한 필요성과 사회적 정당화에 활용했다. 이처럼 프랑코는 내전에서 승리한 '승리의 총통'에서 '평화의 총통'으로 재발견되었다. 이러한 신화화 작업에 관영 언론과 선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프랑스 남서부의 국경도시 엔다예 기차역 정거장에서 국방군 의장병을 사열하는 퓌러와 카우디요
               유럽 전쟁의 향방과 참전 보상의 조건을 놓고 두 독재자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며 대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코의 정치력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에 직면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프랑코는 '스페인 국민들에게 엄격한 중립'을 요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2개월 후인 10월 31일, 그는 국방 위원회를 소집해 군대를 재무장하고, 징병으로 스페인 군대를 150개 사단 규모로 증강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상시 2백만명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그는 모로코에 주둔 중인 스페인군의 규모를 증강시켜 그곳에서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한 프랑스령 통치 지역을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했다. 해군에겐 북아프리카 항구들을 포함해 지중해에서 프랑스의 해상 교통 봉쇄를, 그리고 필요하다면 포르투갈 해안도 봉쇄함으로써 지브롤터를 왕래하는 영국 선박의 통행까지도 저지할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동시에 독일 해군은 스페인의 해안선과 영해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카디스(Cadiz)에 소재한 기지 외에도 비고(Vigo)로부터 21척의 잠수함을 공급받았다. 유조선과 보급선이 오가며 U-보트(U-boat)들에 보급품을 전달했다. 이탈리아의 선박과 잠수함들도 지브롤터 해협을 바라보면서 지중해 방면과 대서양 방면 모두에서 스페인 수역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1940년 4월, 무솔리니는 독일 편에 가담해서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6월 12일, 프랑스가 함락되는 와중에 프랑코는 중립에서 '비교전(非交戰)'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48시간 후에 탕헤르(Tangier)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그는 마드리드 주재 독일 대사 폰 슈토러(von Stohrer)를 접견한 자리에서 만일 히틀러가 원할 경우엔 기꺼이 추축국 진영으로 참전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총통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7월 중순에도 비곤(Vigon) 장군을 시켜서 당시 벨기에의 다코스(d'Acoz) 성(城)에 체류중이던 히틀러와 리벤트로프(Ribbentrop)를 만나 참전하고 싶다는 바램을 전하게 했다. 프랑코는 참전에 따른 조건을 협상하고 싶어했다. 무기 ・연료 ・탄약 ・식량을 보급받는 것 외에도 별도로 보상을 원했는데, '모로코 ・오랑(Oran) ・위도 20도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니제르(Niger)강 삼각주에 이르는 기니(Guinea) 해안 지역'을 참전 댓가로 요구했다. 나치는 프랑코가 제시한 참전의 조건을 보고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며칠 후 히틀러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을 통해 프랑코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조만간 실행될 지브롤터 공격 작전에 협력할 준비를 해달라고 주문했는데, 이는 영국 본토를 공략하는 '바다사자 작전(Unternehmen Seelöwe)'과 동시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 공격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리히트호펜과 비곤이 회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7월 31일에 에리히 레더(Erich Raeder) 제독이 히틀러에게 해군이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고 조언하면서 바다사자 작전은 취소되었다. 히틀러의 관심은 곧 자신의 궁극적 야심인 소련 침공 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프랑코는 스페인을 추축국들이 대서양에서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거점으로 제공할 뜻이 있음을 내비치면서 8월 15일, 무솔리니에게 스페인이 '유리한 시점'에 참전할 수 있도록 자신이 제시한 조건에 히틀러가 응하도록 설득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히틀러는 프랑코가 지중해 서부에서 세력을 떨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지역이 이탈리아의 지배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10월 23일, 프랑스-스페인 국경 지역의 엔다예에서 프랑코와 직접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프랑코는 [시설 상태와 서비스가 엉망이었던] 스페인 철도를 이용해 여행을 했고, 그 바람에 예정 시간보다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치 지도자의 분노를 샀다. 히틀러는 프랑코가 요구한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재차 거절했다. 그는 그 다음날 페탱(Petain) 원수를 만날 예정이었고, 비시(Vichy) 정부와 협력을 강화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히틀러가 요청할 때 프랑코가 참전한다는 것, 지브롤터를 스페인이 차지한다는 것, 분명히 명시하지는 않은 채 나중에 아프리카 영토의 일부를 스페인에 제공한다는 모호한 답변이 담긴 의정서를 작성했다. 12월에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카나리스(Canaris) 제독을 보내 독일군이 15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지브롤터를 장악하는 '펠릭스(Felix) 작전'을 시도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협력을 당부했다.

프랑코는 그러면 영국이 카나리아(Canaria) 제도를 공격하는 것으로 대응할 것이라 우려하면서 대비책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프랑코가 엔다예에서 체결한 합의를 그런 식으로 '배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1941년 2월 6일,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다시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프랑코가 히틀러에게 보낸 각서와 서로 엇갈려 도착했는데, 프랑코는 히틀러 앞으로 보낸 각서에서 독일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수품, 즉 대포 ・예비 부품 ・신호 장비 ・트럭 ・기관차 ・호송차 등의 장비를 대거 요구했다. 이에 히틀러는 '라틴족 허풍쟁이들'끼리는 서로 말이 통할 것이라 생각해 무솔리니에게 편지로 프랑코와 협상을 잘 좀 해보라고 요구했다. 무솔리니는 2월 12일, 보르디게라(Bordighera)에 있는 빌라 마르게리타(Villa Margherita)에서 프랑코와 회동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북아프리카에서 연달아 군사적 재난을 맞은 참이었다. 프랑코는 전쟁에 너무 늦게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운을 떼면서도, 독일이 자신이 요구한 무기를 제공하는데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다고 불평했다. 뿐만 아니라 엔다예에서 제기했던 아프리카 영토 문제와 관련해 스페인 국민의 '세속적 열망'에 대한 독일인들의 오해를 지적하며, 히틀러로부터 제대로 된 보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참전은 곤란하다고 귀띔했다. 독일이 원조를 빨리 보낼수록 스페인은 파시스트 세계의 대의를 위해 공헌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무솔리니는 회동 결과를 히틀러에게 말하면서 프랑코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무솔리니도 프랑코가 지중해에서 자신의 경쟁자로 떠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 by 앤서니 비버(Anthony Beevor) 著 <스페인 내전> 제36장 '망명자들'에서 인용 ・발췌




           1941년 2월 12일, 보르디게라의 이탈리아 왕실 별장 정원에서 두체와 담소를 나누며 산보 중인 카우디요  
           스페인 국내의 제반 사정과 불충분한 원조를 핑계삼은 카우디요는 참전 독촉의 요구를 시종 회피했다.



덧글

  • 2020/02/02 17:23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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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2 18:25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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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2 18:43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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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2 22:01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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