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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기사본말 15권上, 환온이 해서공을 폐립하다

진(晋)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2년(346) 겨울 11월, 안서장군(安西將軍) 환온(桓溫)이 성한(成漢)을 정벌하였다. 조정에선 촉(蜀, 사천성)으로 가는 길이 험하고도 먼데다, 환온의 무리가 적으면서 깊숙이 들어가는 것으로 모두가 우려했지만, 오로지 유담(劉惔)만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여겼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자, 유담은 '도박을 가지고 ...

비수대전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태원(太元) 8년(383) 여름 5월, 거기(車騎)장군 환충(桓沖)이 군사 10만을 거느려 진(秦)을 정벌하고자 양양(襄陽)을 공격하는 한편, 전(前)장군 유파(劉波) 등을 파견해 면수(沔水) 북쪽의 여러 성들을 공략하였으며, 보국(輔國)장군 양량(楊亮)이 촉(蜀, 사천성)을 공격하여 다섯개 성을 뽑아버리고, 더 나아가 부성(涪城)을 공격했으며...

은호(殷浩)의 불운

중군(中軍)장군 겸 양주(楊州)자사 은호(殷浩)가 계속하여 북벌을 시도했으나, 군사가 여러 번 패배하여 양식과 무기가 다 소진되었는데, 정서(征西)장군 환온(桓溫)이 조야(朝野)의 원성 때문에 상소문을 올려서 은호의 죄를 헤아려가면서 그를 쫓아내라고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부득이 은호를 면직시켜서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동양(東陽)의 신안(新安, 절강...

손작(孫綽)이 진애제(晋哀帝)에게 올린 상소중에서...

옛날에 중종(中宗, 晋元帝)께서 용비(龍飛)하신 것[中興]은 천인(天人)이 믿고 따르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만 리(里)나 되는 장강(長江)을 그어놓고 이를 지켰습니다. 지금은 상란(喪亂, 永嘉의 난)이 일어난 이후로 50여년이 되어 황하(黃河)와 낙수(洛水)의 터전은 중원을 포함하여 쓸쓸합니다. 강표(江表)로 흘러들어온 지도 수 세대가 지났으...

환온의 성한(成漢)정벌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안서장군(安西將軍) 환온(桓溫)이 장차 한(漢, 成漢)을 정벌하려고 하는데, 장군과 보좌관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하상(江夏相) 원교(袁喬)가 환온에게 권하며 말하였다."...의론이 일치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천하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호(胡)와 촉(蜀)의 두 오랑캐(後趙와 成漢)일 뿐인데 촉은 비록 험하고 굳지만 호에...

궁전을 수리해선 안 되는 이유

태원(太元) 2년(377) 10월 임인일(12일), 호군장군(護軍將軍) 겸 산기상시 왕표지(王彪之)가 죽었다. 애초에, 사안(謝安)이 궁실(宮室, 顯陽宮)을 늘려서  고치려고 하자, 왕표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중흥(中興, 南遷) 초기에 동부(東府, 建康城 외곽)에서 즉위하여 검소하고 비루함이 있었으나, 원제(元帝)와 명제(明帝) ...

진 효무제(晋孝武帝)의 죽음

황상(皇上, 晋孝武帝)이 술을 좋아하여 그러한 흐름이 내전(內殿)에까지 이어지고, 술이 깬 날이 드므니 밖에 있는 사람들이 궁궐로 나아가 알현하는 일도 아주 적었다. 장귀인(張貴人)은 총애를 받는 것이 으뜸이어서 후궁들은 모두 그녀를 두려워하였다. 9월 경신일(20일)에 황제가 후궁들과 함께 연회를 즐겨 기생과 악대들도 모두 황제를 모셨다. 장귀인은 나...

환온의 1차 북벌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永和 10년(서기 354년)2월 을축일(11일)에 환온(桓溫)이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통솔하여 강릉(江陵, 호북성 강릉현)을 출발하였는데, 水軍은 양양(襄陽, 호북성 양번시)에서 균구(均口, 호북성 균현에서 漢水로 들어가는 입구)로 들어가서 남향(南鄕, 하남성 석천현)에 도착하였고, 보병은 석천(淅川, 하남성 석천현)에서부터 무관(武關, 섬서성 상낙현...

北伐에 반대하는 충고

은호(殷浩)가 북벌할 때 중군(中軍) 장군 왕희지(王羲之)가 편지를 써서 그것을 중지하라고 하였는데, 듣지 않았다. 이미 아무런 공로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다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회계왕 사마욱과 함께) 모의하였다. 왕희지는 은호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지금 작디작은 강좌(江左)에 있게 되어서 천하 사람들의 마음이 서늘하게 된 지가 진...

유유의 남연정벌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義熙 5년(서기 409년)3월에 유유(劉裕)가 표문을 올려 南燕을 정벌하고자 하니, 조정에서의 논의는 모두 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오직 좌복야(左僕射) 맹창(孟昶) ・거기장군부의 사마(司馬) 사유(謝裕) ・참군 장희(臧熹)는 반드시 이긴다고 여겨 유유에게 가도록 권고하였다. 유유는 맹창을 감중군유부사(監中軍留府事)로 하도록 하였다. 사유는 사안(謝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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